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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길을 나서는 마음으로

, 다시 길을 나서는 마음으로

학교 안에서 커뮤니티 만들기

임수진(온양용화고등학교 국어교사)
어떤 여정은 곧은 직선으로 뻗어 있고 어떤 여정은 빙빙 에두르는 길이다. 어떤 여행은 영웅적이고, 어떤 여행은 두려움과 혼란투성이다. 하지만 모든 여행은 정직하게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세상의 절실한 요구를 만나는 어떤 지점으로 이끌어준다. -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 J. 파머, 2019
다음 학교에서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 아니, 실패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실패해보고 싶다는 것이 3년간의 첫 혁신학교 운영을 마치고 천안업성고를 떠나는 나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지만 지금도 그곳에서의 기억을 회상하면 언젠가 실패했던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하고 끝맛은 씁쓸할 뿐이다.
20대의 젊은 치기와 이상으로 맞부닥친 현실은 냉정했다. 혁신학교에 대한 열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수업을 바꾸어 나가면서도 마음 맞는 동료 한 명이 아쉬워 나는 외로웠다. 꿈을 꾸고 현실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쉽지 않을 줄 알았지만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스스로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내향적이고 예민한 기질의 나는 혁신학교에 대한 반대와 저항 앞에서 조금씩 마음 한구석이 허물어져 내렸다. 늘 열정적인 것처럼, 행복한 것처럼 기운을 끌어내느라 무던히 애썼고 때로는 설득하고, 때로는 맞서며 아주 작은 변화를 가까스로 함께 만들어내느라 진이 빠졌다.
다른 방식이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부족해서일까. 떠나는 그 날까지도 아쉬움이 남았다. 좀 더 나이가 들었다면, 좀 더 지혜로웠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들이 가슴 한구석에 흉터로 남았고 구성원들과 맞서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에너지들에 대한 애도가 물에 젖은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굳이 성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보다도 아름다운 실패라는 것이 어울리는 나날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학교 안에 커뮤니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내가 지금껏 해오지 않은 다른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8년, 첫 부임지였던 성환중학교에서 만나 지금까지 나에게 다양한 교육의 장을 열어주던 손주영 선생님께서 파커 J. 파머의 철학에 기반한 ‘함께 이끌기(Leading Together, 학교 안에 커뮤니티 만들기)’ 활동가 과정 연수를 함께 공부하자고 초대하셨다. 그렇게 오해균 선생님, 노혜진 선생님과 넷이 함께 마음을 모아 교육센터 ‘마음의 씨앗’에서 1년간 교육을 받으며 함께 이끌기 서클을 공부하게 되었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활동은 1992년 초, 중, 고 교사들을 위한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되었다. 같은 제목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파커 J. 파머의 책은 교육과 교사에 대한 책 중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다. 이 책에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프로그램의 접근법이 기술되어 있다. 그때부터 CCR(Center for Courage & Renewal 용기와 회복 센터)은 일과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과정을 통해 수천 명의 교육자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우리는 교사들이 학교 커뮤니티 안에서 협력과 지지를 경험하고 자신들의 일이 즐겁다는 것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 학생들의 배움과 그들의 삶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안다... 학교를 위한 리더십 프로그램 ‘함께 이끌기(Leading Together): 학교 안에 커뮤니티 만들기’는 학교를 혁신하고 학생들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각각의 교육자들과 함께한 우리의 작업에 바탕하고 있다.(함께 이끌기, 2019)
이 과정을 공부하며 다음 혁신학교인 온양용화고로 옮기면서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고 다짐했다.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보듬고 지지하는 따뜻하고 온화한 공동체 안에서 나도, 그리고 동료 교사들도 성장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고 그 이면에는 다시 내 서투름으로 인해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도 한 움큼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 수요일에 있는 온양용화고 가족의 날에 선생님들을 초대해 함께 이끌기 서클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학생들이 4교시까지 마치고 귀가하거나 자율 동아리에 참여하는 날로, 선생님들은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하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당시 교내 전학공은 교과 중심으로 돌아가 다른 공부를 위한 시간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 세 시간은 서클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었다.
2019, 첫 서클, 자신의 느낌을 찾는 선생님들
서클의 특성상 20명이 넘으면 한 명의 진행자가 구성원들의 요구를 돌보기 어려워 걱정했는데 다행히 15명 내외의 선생님들이 모이셨다. 정기 모임을 이어가다 활동가 과정을 함께 마친 동료 풀잎을 불러 서클을 함께 진행하기도 하고, 회복적 생활교육으로 15시간 직무 연수를 꾸려 아산 지역 선생님들을 초대해 교내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하는 알찬 시간이 이어졌다.
▲ 2019년, 감정 돌보기 서클 참여를 위해 선생님들께 보낸 초대의 글
▲ 2019, 감정 돌보기 서클
▲ 2019, 회복적 생활교육 직무연수
그러나 서클을 운영한다고 해서 학교 안에 아름다운 커뮤니티가 바로 생기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물음 그 자체를 견디고 삶으로 살아내 결국 그 자체로 답이 되는 릴케적 삶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빠르게 해결책과 수단, 도구를 찾아 나서고 싶어 했으나 서클은 여러 도구 중 가장 많은 정성과 품이 드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효율만을 따지자면 서클을 시작해서는 안 됐다. 세 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운영 프로그램과 프린트물, 제반 준비물은 차치하고서라도 서클 진행자로 오롯이 존재해야 하는 그 세 시간이 참으로 어려웠다. 이는 내 천성적인 예민한 기질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가 학교 안에 존재하는 구성원으로서 여러 사건에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클 안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고 서로 지지하며 내면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꺼낼 수 있도록 작지만 따스한 빛을 비출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내 안의 비판자는 오랜 공부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판단 없이 침묵 공감으로 현존하며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점점 답답하고 부담스러워졌다.
아마 비폭력대화를 함께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서클을 위한 연결은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 기여하고 함께 연결되고 싶다는 내 깊은 욕구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서클을 운영하면 할수록, 학교 안에 커뮤니티 조직자로서의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과 함께 본인의 소양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가끔은 아름다운 조화 같은 가짜 커뮤니티를 공들여 가꾸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허무했다. 물론 이 역시, 보다 진정성 있게 소통하고 싶다는 나의 간절한 욕구가 자꾸만 영혼을 뒤흔들기에 받는 느낌이었다.
2020년은 코로나 발발로 인해 교내에서 전학공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비폭력대화 연수나 MBTI 연수를 하며 간간이 연결을 시도했다. 2021학년에는 마음을 가볍게 내려놓고, 세 시간 동안 준비해야 하는 함께 이끌기 서클을 하기보다는 PDC 학급긍정훈육법과 연계한 서클로 선생님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매월 두 번째 주 수요일 오후를 학습 주제 위주의 전학공 시간으로 잡고 나니 예전 용화 가족의 날에 교직원 동아리 활동과 병행할 때보다는 안정적으로 만날 수 있었으나, 간혹 교내 연수와 시간이 겹쳐 만나지 못하는 달도 있었다.
그래도 예전과 달리 전학공 안에서 작게나마 역할을 분배하고, 가이드라인도 함께 만들며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동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구성원들이 많은 고등학교들은 보통 교무실이 다르면 얼굴을 마주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복도에서 마주칠 때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우리의 약속 중 하나가 되었다.
▲ 2021, 전학공 약속
▲ 2021, 교내 전학공 서클 운영 모습
2019년, 온양용화고로 옮기며 나는 실패하게 되더라도 예전과는 다른 실패를 하고 싶다고 조용히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실현되었다. 내 생각이 옳다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같던 천안업성고에서의 모습과 달리 온양용화고에서는 선생님들과 특별히 첨예한 갈등 상황을 만들지 않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를 만들기 위해 인내하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파머는 교사들을 ‘문화 영웅’이자 ‘긴급 구호자’라고 부르며 교사들의 회복이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의 힘을 역설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개인의 회복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결국 모두가 평등하게 책임지는 동료 관계를 형성하여 개인들이 섬기고 있는 조직을 변화시키도록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서클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겸손하고 작아진다.
그간 나는 온양용화고 선생님들의 회복에 충분히 기여했을까? 우리의 조직 문화를 바꾸고 상호 신뢰의 기반이 되는 ‘마음의 습관’을 키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을까?
이제 나는 선생님들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에서 깎이고 빛바래져 사라지는지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중병아리 교사가 되었다. 도전이란 단어가 가슴 뛰도록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고 예고된 좌절과 실패가 체스판처럼 눈앞에 그려지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일종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어떤 교사로 살아갈 것인가. 공동체 안에서 나의 장점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내 숨을 막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찾아 나서야 한다니, 막막한 마음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이 전학공이나 혁신학교를 운영하는 선생님들에게 용기와 희망보다는 익숙한 고통과 슬픔으로 다가가지 않을까-하는 울적한 생각도 글의 말미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이 6년간의 과정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결국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영혼의 빛을 찾아주는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 인간은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는 평범하고 소박한 진리이다. 이를 공유하며 글을 갈음하고자 한다. 이 긴 여정을 함께 하는 그대에게, 진심 어린 사랑과 감사를 보내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들 옆에 있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 작자 미상
학창 시절 내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좋아한 적이 없었고 잔병치레가 많아 결석이 잦던 책벌레 아이가 사범대학교를 졸업해 학교 가는 것을 ‘가끔’은 정말 즐겁게 생각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교사 인문학 팟캐스트 ‘이해됨(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됨)’에서 진행을 맡고 있으며 ‘신화, 전설, 괴담, 꿈’에 관심 많은 엉뚱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시민들과 함께 교육과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나라 교육 현장이 삼 주체 모두 행복한 곳으로 거듭날 수 있길 가슴 깊이 소망하는 이상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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