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성: 성숙하게 나대기
양철웅(온양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앤디 듀프레인의 이야기
'명작영화'라고 하면 항상 순위에 오르내리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은 '쇼생크 탈출'(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1994년 작)입니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주도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생각의 끝에 이 영화가 떠오릅니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앤디'(팀 로빈스)는 잘 나가는 은행가였지만,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감옥에 들어와 적응에 어려움을 겪지만, 차츰 동료 죄수들과 관계를 맺고 감옥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또다른 주인공인 '레드'(모건 프리먼)와 깊은 우정을 쌓고 20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탈출하고, 나중에 출옥한 친구 '레드'와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줄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 앤디와 나머지 죄수들이 감옥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말살된 감옥 안이지만, 앤디는 자신이 뭔가를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해 나갑니다. 선택, 결정, 실행의 과정에서 오는 어려움을 당연하게 감당하면서 주변에 기여합니다. 영화 속 한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앤디는 교도소 도서관에 책이 매우 적고, 시설도 낡고 허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앤디는 교도소 도서관을 확장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실행해 나갑니다. 주 정부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서 도서 기부와 예산 지원을 요청합니다. 은행가였던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간수들의 세무와 회계 업무를 도와주고, 간수들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만들어 '도서관 확장 프로젝트'를 간수들이 방해하지 않게 합니다. 처음에는 주 정부가 앤디의 도서 기부와 예산 지원 요청을 무시하지만, 6년 동안 매주 한 통씩 편지를 보내자 주 정부가 헌 책과 중고 도서, 레코드판과 클래식 음악 앨범을 기부했고, 주기적으로 소액의 예산을 지원하기로 합니다. 앤디는 낡은 책장밖에 없던 도서관에 테이블, 레코드판, 클래식 음악앨범 등을 멋지게 차려놓고, 문맹자를 위한 기초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합니다. 쇼생크의 죄수들은 앤디의 노력 덕분에 쉴 수 있고, 지성을 기를 수 있는 도서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데, 왜 갑자기 '쇼생크 탈출' 이야기를 하냐면, '주도성'을 지닌 사람은 이 영화 속 '앤디'와 같이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가 없는 감옥에서도 앤디는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가치가 이루어진 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그 시작은 혼자였지만, 그 과정에서 동료와 친구를 만들고, 적대적인 환경을 우호적으로 만들면서 교도소 조직 내에서 조금씩 그 가능성을 높여갑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때로 비난과 오해를 사기도 하고, 독방에 갇히는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감당하면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해나갑니다. 기존의 권위나 관습에 무의식적으로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와 욕구에 따라서 선택을 하고,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연결 고리를 맺으며,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오는 오해과 고통을 끝까지 감수하면서, 그것을 실현해내는 모습이 제가 이해한 '주도성'을 지닌 인간처럼 보였습니다.
주도성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 자율성, 자기주도성
좀더 구체적으로 '주도성'(agency)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등장한 '주도성'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자기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학습하고 책임 있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역량"(The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education 2030, OECD, 2023)입니다. 언뜻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던 '자율성'이나 '자기주도학습'에서 말하는 '자기주도성'이라는 말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주도성'이라는 단어는 '자율성'이나 '자기주도성'과 결이 다른 의미를 지녔습니다. '주도성'은 '나'만을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와 '사회'를 고려해서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고 선택하며, 그 과정에서 오는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주도성입니다. 이 '주도성'(agency)에 대해서 이해하기 전에, 주도성과 비슷하지만 주도성이 아닌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자율성'은 자신의 이성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는 특성을 자율성이라 합니다. 이 자율성을 지닌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 있는 지식, 정보, 논리 체계를 작동시켜서 옳고 그름을 혼자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칸트의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라는 정언명령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나'가 키워드입니다. '나'의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이는 과거에 종교나 정치적 권력 아래 억눌려서 개인이 스스로 아무런 선택을 하지 못하던 시대에, 권위에 무의식적으로 순응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등장한 개념입니다. 이 자율성도 언뜻 보면 멋지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자율성 안에는 나와 함께하는 공동체, 타인에 대한 고려는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성만 판단의 근거가 되고, 공동체와 타인은 판단의 과정에서 배제됩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현대의 민주사회에서 성숙한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혼자만 존재하는 자율성이 아니라, 타인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주도성이 필요합니다.
'자기주도학습'에서 말하는 '자기주도성'이라는 말도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주도성'과 결이 다릅니다. '자기주도학습'을 가장 잘 하는 학생은 혼자 계속 공부를 해내는 학생입니다. 교실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 공부만 잘 해내는 전교 1등 학생을 상상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자기주도학습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실천하고, 스스로 모든 과정을 점검하고 평가해서, 다시 스스로 목표를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목표-계획-실천-점검-다시 목표'의 과정을 무한 순환하는 것이 자기주도학습입니다. 여기서도 '나'가 키워드입니다. '나'의 성장을 위해서 '나'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연결되는 지점은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스스로 모든 과정을 선택하고 실천합니다. 이것만 잘 하는 학생은 공부를 잘 할지는 몰라도, 이 사회와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파악하고, 이 가치를 이 사회 속에서 실현해서 모두를 잘 살게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며 능동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주도성이라는 말에는 '나'와 '함께'가 공존합니다. OECD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2023, OECD) 보고서를 보면, "주도성은 목적을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나'의 능동적인 결정을 강조하지만, "주도성은 학생들이 사회에 참여하여 사람들과 사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책임감을 수반"한다고 하며 나의 능동적인 결정과 선택을 하되, 사회 속에서 타인과의 연결 관계 속에서 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책임을 지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왜 '자율성', '자기주도성'과 같이 혼자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연결되어서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것을 강조할까요? OECD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2023, OECD) 보고서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21세기 교육이 직면한 도전 과제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미래에는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문제가 심각해지고, 이주민이 증가해서 문화적 다양성이 심화되며, 자본주의 고도화로 불평등이 점점 심화하고,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아질 가능성이 큽니다.
급변하고 불안정한 미래사회에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공동체와 네트워크 속에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 가치를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공감을 얻어내며, 사람들과 연결되어서 조금씩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가슴으로 느낀 가치, 머릿속으로 생각한 논리와 계획을 혼자서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공유하고, 공감대를 얻고, 모두 함께 보조를 맞추어서 실행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감정·가치·논리도 존중하고, 의견이 부딪칠 때 그 의견을 조정하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소모와 스트레스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도 필수 요소입니다.
개인의 삶에서 주도성은 왜 필요한가?
하지만 미래사회라는 거대담론은 저에게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가 피부에 와닿는 것은 개인의 삶이라는 작은 이야기에 집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왜 개인의 삶에 주도성이 필요할까요?
애초에 타고나기를, 책임 지기를 어려워하지 않는 학생도 있고, 그것을 어려워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책임지기를 어려워하는 학생은 아마 다른 면에서 강점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더 논리적이고 세밀하게 하거나, 타인의 마음을 세심하게 읽어내고 배려하는 면에 탁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모양이 있고, 그 모양을 잘 가꾸며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책임 지기를 어려워한다고 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주도성이라는 특성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해서, 주도성을 발휘하지 않으며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장면들은 시기마다 매우 다양하게 찾아옵니다. 사람은 강점대로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주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반드시 스스로의 가치에 따라서 판단하여 결정하고, 주변을 설득하고, 갈등 상황을 관리하면서 그 결정을 책임져야 할 순간이 옵니다. 그 일은 학생 시절에 모둠 활동이나 학급 회의에서 경험할 수도 있고, 대학에 가서 분임 발표를 하며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직업을 갖고 나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거칠 수도 있고, 결혼을 하고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도 겪을 수 있습니다.
가치에 기반해서 결정해보지 않으면, 왜 자신의 가치에 기반해야 일관성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능동적으로 결정을 해보지 않으면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환경, 사람과 관련된 조건을 검토하는 방법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을 외부에 드러내보지 않으면 결정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다룰 수 없게 됩니다. 결정해봐야 반대에 부딪치기도 하고, 갈등 딜레마 상황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다양한 삶의 장면에서 매번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주도성은, OECD 보고서에서 말하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사회 변화라는 거대담론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작은 삶의 맥락에서도 꼭 필요한 역량입니다.
주도성은 타고나는 것일까?
주도성의 개념과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이런 '주도성을 지닌 사람'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 마음으로 '리더'라고 인정했던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우리는 앞서 언급한 특성을 지닌 사람을 보통 '리더'라고 부릅니다.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더의 모습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모두 다르기에 어떤 리더를 바람직한 리더라고 딱히 정하기는 어려우나, '주도성'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어떤 공동체에서 그 사람을 리더로 인정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리더는 타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교육에 따라 길러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리더가 타고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주도성을 지닌 학생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생님의 노력 여부에 상관없이 주도성을 타고난 아이는 리더로 성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도성의 DNA를 지니고 있어도(만약 그런 특성을 담당하는 DNA가 있다면) 환경이 없으면 그 DNA가 발현되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인간이 백지와도 같아서 어떤 경험과 깨달음에 의해서 주도성이라는 특성이 하얀 도화지에 그려질 수 있다면, 우리가 교실 속에서 주도성을 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됩니다.
전 후자의 생각을 지지합니다. 저는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상당 부분 있으나, 아무리 특정한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해도,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교실·문화를 만나지 못하면 그 가능성이 현실로 발현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동화 '미운오리새끼'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독수리인지도 모른 채 오리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뇌는 변화할 수 있는 '가소성'이 가장 큰 특징이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서툰 일이라도 반복적인 노력과 특정 환경에의 노출에 의해서 해당 특성을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탁구를 잘하는 DNA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어도, 매일 탁구 클럽에 나가서 탁구를 치면 올림픽까지는 아니어도 지역의 사회인 탁구 리그에서는 활약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도성은 길러질 수 있습니다. 노력과 노출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습니다. 뇌에서 뉴런 사이의 연결은 고체처럼 단단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환경에 의해 노출된 후, 그 환경에서 필요한 사고와 행동을 반복할 때, 해당 사고·정서·행동을 담당하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이 형성되면서 어떤 특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가타카'(앤드류 니콜 감독, 1998년 작)에서 유전적으로 열등한 주인공이 탁월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형을 수영에서 이기는 장면이 영화 속 극적 장면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주도성을 요청하는 환경에 놓여져서, 자신의 가치를 성찰하고, 결정을 내려보고, 친구들에게 발표하고, 자신의 결정과 타인의 결정을 비교해보며 대화해보는 환경에 노출된 학생은 주도성이라는 특성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도성이 발현되기 위한 교실은?
OECD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2023, OECD) 보고서는 주도성이 발현되기 위한 수업 단계별 실현 방안에 대해서 제시합니다. 수업 설계 단계에서 학생을 수업 설계 과정으로 초대하여 공동으로 수업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교수학습 방법을 교사주도의 강의식 수업에서 토론·탐구·프로젝트 기반 학습 등으로 전환합니다. 학생이 작은 교사로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게 할 수 있습니다. 평가 단계에서는 평가의 방식과 내용을 교사와 학생이 상호 협의하여 정할 수 있습니다. 수업의 모든 단계마다 학생을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학생의 주도성이 신장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방법들에 모두 동의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바는, '성숙하게 나댈 수 있고, 상대가 나대는 것을 존중해주는 교실 문화와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나댄다고 꺼리는 문화가 있지만, 저는 주도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대는 것'을 독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마음껏 성숙하게 나댈 수 있는 과정을 열여줘야 합니다.
듀이는 학교가 하나의 작은 사회라고 합니다. 이 작은 사회에는 작은 과정들이 있습니다. 토의토론 수업, 프로젝트 수업, 반장선거, 학급자치회의, 학생회, 체험학습, 학교 축제, 체육대회 등의 과정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나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내고, 역할을 맡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하고, 결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같은 팀 친구들과 생각을 공유해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예의 없이, 배려 없이 나대면 불필요한 갈등이 유발되기 때문에 서로 나대는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술과 태도도 알려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토론 수업을 통해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며 서로 소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에 대한 사실적인 질문이나 추론적인 질문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한 후에 자신의 가치관에 기반해서 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습니다. '홍길동은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느냐?'라는 질문에는 자신의 가치관이 들어설 여지가 적습니다. '신분제도 때문'이라는 어느 정도 정해진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네가 홍길동이라면 서자로서 어떻게 그 사회를 살아갔을 것 같은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자신의 가치관을 되돌아보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평등', '인간의 존엄함', '혁신', '사회 변혁과 자신의 행복' 등에 대해서 고찰해서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끄집어내도록 한 후, 학생들이 친구들의 고유한 생각을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도록 사회적 기술과 태도를 알려주어 성숙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문화를 만든 후에, 프로젝트 수업에서 해당 모둠의 주제와 탐구 방식을 모둠에서 스스로 정하도록 한다면,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꺼내어 표현하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모둠 공동의 결정을 내리고, 결정에 책임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학교 축제에서 학급 부스를 운영할 때에도 '성숙하게 나대는 과정'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만약, 학생들에게 자율적으로 학급 부스를 운영하라고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학급에 따라 다양할 수 있겠으나, 아마 소수의 학생들이 주도해서 모두 결정하고, 다른 학생들은 결정에 순응해서 따라오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방식은 이미 주도성을 지닌 학생들이 더 주도성을 갖게 할 뿐입니다.
반면, 선생님의 기획 하에 학급 구성원의 수준과 경험에 따라서 학급 부스 운영 과정을 조절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학급 부스 운영을 위한 구체적인 과정(회의를 통해 테마 정하기-해당 테마로 부스를 운영하기 위한 팀 구성하기-팀별 1인 1역 부여하기-반장과 팀장 협의체 구성하기-물품 준비하기-1인 1역 준비-부스 운영-피드백 등)을 반장에게 먼저 안내하고 회의를 유도하게 한다면, 학급 반장은 조금 더 짜임새 있게 회의를 진행하고 부스 운영을 주도할 것입니다. 모든 학급 구성원에게 부스 운영 과정에서 서로를 배려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면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참여하지 않고 소수의 일벌레가 부스를 운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부스 운영을 위해 구성해야 하는 팀의 목록이나 1인 1역의 예시, 팀장 역할 등에 대해서 반장에게 안내하고 구성하도록 유도한다면, 각각의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1인 1역을 맡고, 팀장이라는 중간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결정해야 하는 여러 지점들이 있고, 학생들은 그 결정을 하고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며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미 하던 것
제가 이해한 주도성, 제가 생각하는 주도성이 필요한 이유와 교실 속 실현 방향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입시, 평가 등 바쁜 학사 일정에 매우 쫓기는 교실 환경과 선생님들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모든 아이들에게 주도성을 발휘할 교실 환경을 새롭게 마련해줘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도성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다양한 혁신 교육, 민주시민교육, 토의토론 수업, 프로젝트 기반 학습, 생활지도와 학급운영 방법 등에 주도성의 요소들은 다 녹아 있습니다. 하던 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하거나 강조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선생님들의 교실과 교무실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웃음이 있기를 바라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한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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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2023, OECD)
삶이 보여주는 새로운 장면 속으로 한 걸음씩 제대로 걸어가고 싶은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