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나무학교의 나이가 열 살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나이로는 유년기이지만, 공동체가 생기고 사라지기를 쉽게 반복하는 걸 보면 나무학교는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접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나이는 개인의 나이와는 사뭇 다른 질감을 갖습니다. 공동체의 나이는 지나가는 것보다는 퇴적되는 것에 가깝다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무학교는 리좀 구조를 기반으로 한 민주적 철학을 바탕으로 선생님들의 수업 고민과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뿌리를 뻗는 공동체입니다. 철학은 공동체에 서사를 부여합니다. 이러한 서사성은 공동체 내에서 소화되어 자양분으로 퇴적됩니다.
제가 처음 나무학교에 왔을 때, 폐교 위기의 시간이 있었다는 지나가는 말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폐교 위기를 지켜낸 것은 토의와 협의, 그리고 개개인의 선생님들의 열의였습니다. 나무학교는 누구 하나가 이끄는 곳이 아니지만, 그 누구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끄는 곳입니다.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사회적인 곳입니다. 폐교 위기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 공동체에 색깔이 되었습니다. 나무학교를 돌아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스칩니다. 이를테면 코로나 시절에도 방역 수칙을 준수해 가며 어떻게든 수업을 나누며, 시기에 맞는 담론이라 할 수 있는 비대면 수업의 과제와 고민들로 모였습니다. 시련이 있을수록 더 깊고, 넓게 뿌리 뻗는 나무학교를 보고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저는 나무학교에 가입한 지 3년 정도가 지나가고 있는데요.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 없음이 우리의 공동체를 이끄는 구심력이 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알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솔직하지 못하고, 겁도 많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저의 단점을 누군가가 이 공간에서 장점으로 메우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관념적으로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무학교에서는 저의 관념적인 습관을 실천적인 마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를테면 행사를 기획할 때 발 벗고 일하려고 하시는 선생님들 그리고 함께 식사하는 작은 순간 속에서도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묻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웁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이렇듯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겸손하게 제 자리에서 노력하고 있을 때, 저의 단점을 누군가가 메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고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따스하다는 감각으로 은근하게 다가옵니다. 저는 성장교실 8기 졸업생이지만, 그 뒤로도 나무학교와의 느슨한 연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따스함이 저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우리 학교가 가진 것들을 알기 어렵다는 것, 그래서 알기 위해서라도 더 나무학교를 애정하게 됩니다.
나무학교의 열 살. 그래서 성장교실을 졸업하고 나서도 나무학교 회원으로 남아 계신 선생님들의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도 같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따스함이 이 공동체를 이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번 여름 워크숍으로 10주년 잔치를 나무학교 회원 모두가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은숲 기획팀 회의를 통해 홈커밍데이를 기획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단점은 곧 장점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느슨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위계가 없다는 장점이 있기에 민주적입니다. 그러나 그 느슨함은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구심점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의문들이 해마다 선생님들 회의의 화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혜를 모으며 우리 공동체를 화합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들을 늘상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홈커밍데이는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하는 생각이 컸던 듯합니다.
먼저 성장교실에서 졸업한 선생님들께서 느끼시는 감각과 현재 나무학교에서 활동 중이신 선생님들께서 느끼는 감각을 나누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즉 나무학교에서의 세대 담론을 녹여내는 시간을 가져야 했지요. 그렇게 우리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고민 끝에 회의를 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장소를 모색하여 홈커밍데이를 진행했습니다. 활동을 통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이어져, 변화와 인내의 과정으로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귀한 기록을 나눕니다.

홈커밍데이는 기조연설로 시작했습니다. 청주교대 교육학과 박은주 교수님께서 진행하셨던 강의였는데요. ‘배움’을 주제로 학생주도성에 대한 성찰을 강의에 담으셨습니다. 저는 ‘OECD 교육 2030:미래교육과 역량’의 맹점을 지적하시는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박은주 교수님께서는 학습나침반이라는 학습담론이 가리고 있는 것들을 지적하셨습니다. 학습자를 완성된 성인처럼 생각하는 것은 자칫 방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자율은 좋은 개념입니다. 자율적으로 사는 삶은 주체와 방향을 자각하고,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독립적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뜻인 자율을 배우기 위해서는 관계적 개인으로서의 교류를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 최전선에 교육이 있습니다. 결국 자율성이란 학생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호흡하고 소통할 때 이루어집니다.
교수님께서는 OECD의 교육 담론이 가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대해서도 지적하셨습니다.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교육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에서, OECD 교육이 갖는 한계를 짚어내셨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자율적 교육이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율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자율의 허울을 가진, ‘경쟁’의 교육, ‘각자도생’의 교육, 공동체 담론으로부터 ‘도피’의 교육이 됩니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적 자본 논리에 따라 교육이 흐른다는 것은 교육 담론의 한 주체인 교사가 소거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갖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현상의 결과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한국리서치 정기조사 여론 속의 여론(2004)’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교육활동 침해의 주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학부모의 내 자녀 중심주의’가 50%로 집계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공동체를 개인으로 쪼개고, 자본 권력으로 경쟁하게 만듭니다. 이는 자율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주체로서 각각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자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교육을 상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상품은 돈을 지불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지요. 이러한 교환적 관계, 대가적 관계에서 ‘고마움’은 쉽게 증발합니다. 교사와 학생과 맺는 관계인 잠재적 교육과정, 혹은 영 교육과정은 자본으로 치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적 교육과정은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사랑’, ‘배려’, ‘정직’, ‘정의’ 등은 겸손과 고마움 위에서 싹틉니다. 고마움을 배우려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기반되어야 하고, 주체로서의 존중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우선 두려움이 앞섭니다. 교육의 주체로서 무엇을 가르칠까 고민하기 이전에 싹트는 두려운 감정은 교육이 해결해야 할 문제에 앞서 교육 현상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함께 고민을 맞대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외부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소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교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교수님의 강연 중 교육의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말씀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제작’과 ‘방임’의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작은 외부의 목적을 설정하고 만들어가는 교육이고, 방임은 무세계성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권리가 무제한적으로 수용되는 교육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수업’과 ‘상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제작과 방임 사이, 가장 적절한 지점을 찾아 학생들과 만나야 합니다.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웰슬리’에 찾아온 교수 왓슨(줄리아 로버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인데요. 그곳에서 학생들은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그저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왓슨 교수가 가르치는 현대 예술에 대해 반기를 들지요. 그들의 삶은 제작된 삶입니다. 하지만 왓슨은 자신의 철학을 당당하게 밝히며, 변화를 일으킵니다. 사회적 통념을 엎고, 자신의 독자적인 교수 역량을 이루어 냅니다. 왓슨은 방임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쉽게 방임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데요. 왓슨의 태도를 보며, 교육은 학생들을 통해 내 스스로가 선택한 삶을 지켜나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르침이 두려움이 된다는 것이 슬픕니다. 그러나 슬픔은 나아가게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슬픔 또한 과정입니다. 다만 슬픔을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면하는 순간 슬픔은 슬픔이 아니게 되고, 성장의 실마리를 가져다 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 이것을 감당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언어화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 관계는 한 걸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직면은 나아가게 하지만, 도피는 머물게 합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똑같은 고민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든 좋습니다. 그 공동체에서 만난 고민은 서로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녹슨 칼을 간다고, 칼날이 다시 빛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칼날을 가는 마음에는 빛기운이 서립니다. 그리고 그 빛기운은 희망을 부릅니다.
기조연설이 끝난 후 활동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획 회의에서 고민했던 방향대로, 우리는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토의했습니다. 교직의 여정을 기차역에 비유한 활동이었는데요. 출발역(나무 학교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어떤 교사였나요), 회상역(기억에 남는 순간), 현재역(지금의 나는 어떤 교사인가요), 환승역(나무학교를 하면서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다음역(앞으로 나는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가요)으로 각 기차역(질문)을 준비하여 이를 나누었습니다.
나무학교가 갖는 힘은 이런 것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방향이 올바르다면 나아가는 것이 진보이지만, 방향이 올바르지 않다면 나아가는 것은 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향이 올바르지 않을 때는 멈추고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진보입니다. 그렇기에 진보는 성찰 위에 있는 것이겠지요. 나무학교는 성찰하는 공동체입니다. 귀여운 질문들로 구성했지만, 각각의 질문은 선생님들의 삶을 편안하게 드러내며 성찰할 수 있는 것들로 되어있습니다. 남미의 인디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개념과 다릅니다. 우리는 미래를 보며 나아간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남미 인디언들은 미래를 등지고 뒤로 걷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과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과거를 통해 그 가능 세계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지요.
옛날에 고양이를 키우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주택에 살았는데, 고양이의 자유를 생각해서 현관문을 열어주었지요. 그래서 고양이는 매일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고 싶을 때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친구의 마음은 비장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고양이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선 문을 열어준다는 것이었지요. 늘상 고양이는 돌아왔지만, 늘상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과 함께 고양이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도 고양이와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는 나무학교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제의 나무학교를 바라보며 소중히 하면서도, 우리는 미지의 자유로 나무학교를 풀어놓습니다.
나무학교의 과거인 ‘회상역(잊히지 않는 순간, 누간가의 말이나 행동이 있나요?’에서는 ‘힘든 일이 있었을 때 도닥여 주던 선생님’, ‘함께하는 힘이 세다’, ‘잘하고 있어요. 수고했어요’ 등 따듯한 감정들과 닿아있는 말 혹은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떠돌고 있는 언어는 그 공동체의 온도를 조절합니다. 저는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실패는 곧 도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실패할 권리를 잃는 공동체는 한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고, 결국 거꾸러집니다. 제 삶에서 무엇이 가장 실패를 두렵게 한 것일까요? 저는 경쟁과 편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성공이라는 관념이 구체적인 경제 관념과 밀접하게 맞닿아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일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고, 이러한 두려움은 새 길에 대한 탐구를 앗아갑니다. 그러나 나무학교에서는 사뭇 다른 듯합니다. 추락을 대비하는 단단한 언어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말들만 보더라도 여기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새 누군가가 이를 메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역(앞으로 나는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가요)’에서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사’, ‘아이들 마음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교사’ 등의 말들이 오갔습니다. 저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타인에게 그 상처를 고스란히 반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자신을 치유하고 타인도 보듬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따듯함을 느낀 사람은, 그 전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정희진 작가는 ‘책 읽는 행위를 텍스트를 통과하는 행위’라고 봅니다. 저는 사람과 책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듯한 사람을 주위에서 만나고, 이를 통과한 사람은 그 전의 모습과는 달라진다고 믿습니다. 이는 물리적 변화라기보다 화학적 변화에 가깝습니다. 나무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분명 수업이나 관계에서 고민을 갖고 오신 분들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공간에서 따듯함을 느끼고, 또다시 따듯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로 변화합니다.
성찰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일입니다. 미움을 배운 사람은 미움으로, 사랑을 배운 사람은 사랑으로 언어를 되갚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서사를 돌아보며, 첫 마음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나무학교가 생기던 첫해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발 담근 순간부터의 첫 마음을 돌이켜 보는 것과 나무학교의 첫해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소통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소통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을 어떻게 다 주워 담을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됩니다. 홈커밍데이의 기억을 더듬어 풀어내라고 했는데, 적다가 보니 제 삶을 너저분하게 흘려놓은 듯한 마음도 지우기 어렵습니다. 나무학교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더러들 논쟁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어떻게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합의도 과정이고, 갈등도 과정입니다. 공동체는 과정을 견디며 통과해 내는 데 존재 의미가 자랍니다.
그러니 저는 나무학교가 더욱 뜨거운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동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소란한 갈등이 아니라, 매끈한 합의입니다. 매끈한 합의는 권력 관계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 뜨거운 공동체는 자신의 다른 생각을 용기 있게 표현할 때 생깁니다.
문두에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를 인용했습니다. 저는 늘상 나이테를 통과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듯합니다. 나이테는 겨울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겨울에 더 단단하고 진하게 자란다는 사실은 저를 희망차게 합니다. 교사로서 마주한 된서리는 유난히도 시립니다. 한 해를 살아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막막함 속에서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훌륭한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무학교가 열 살이라는 것은 큰 의미입니다. 지나온 세월이 이미 씩씩하게 퇴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는 갈등도, 화해도, 미움도, 사랑도 가득할 것입니다. 나무학교의 나이테인 공동체 서사가 꾸준히 이어졌으면 합니다. 나누고 나아가며, 서로 기대는 든든한 공간으로의 나무학교 열 살을 기쁜 마음으로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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