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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별 수업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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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면 성장하는 신비한 수업 1부

맛있으면서도, 쉽게 끓여 먹을 수 있는 찌개가 바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다. 자작하게 끓여진 김치찌개 한 입 얼큰하게 떠먹고, 흰 쌀밥 한 숟가락 떠먹고, 찌개 속에 있는 고기를 찾아내서 함께 먹으면, 입에서는 김치, 쌀밥, 고기, 얼큰한 국물이 어우러져 작은 파티가 벌어진다. 냉장고에 있는 달걀 꺼내 계란프라이까지 해서 함께 먹으면 이것이 바로 소확행이다.
지금은 요리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처음 김치찌개를 끓일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단순하게 돼지고기와 김치, 고춧가루의 양과 시간만 잘 조절하면 되는 줄 알고, 재료를 대충 집어넣고 15분 정도 끓였다. 그런데 뭔가 국물이 밍밍했다. 찾아보니 돼지고기를 오래 끓여야 국물맛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넣고 오래 끓인 다음에 다른 재료를 넣고 끓여내니 국물 맛이 나아졌다. 그런데…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알아보니, 멸치로 육수를 낸 후에 거기에다가 찌개를 끓이면 더 맛있다고 한다. 멸치로 육수를 낸 후에 재료를 넣고 끓여보았다. 이전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멸치 육수를 내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다시 알아보니, 젓갈로 소금간을 대신하면 국물 맛이 더 좋아진다고 했다. 그렇게 해보니 확실히 국물 맛도 좋아지고 간편했다. 그런데, 먹다보니 돼지고기에서 잡내가 나는 것을 느꼈다. 돼지고기 잡내를 없애려면 돼지고기의 핏물을 빼내고, 술에다가 돼지고기를 담그거나 요리에 맛술을 조금 넣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술을 활용하니 잡내는 조금 사라졌다. 그런데 또 먹다보니 돼지고기가 퍽퍽하게 느껴진다. 이제 돼지고기를 연하게 할 방법을 찾아볼 차례다.
나에게는 수업이 이 김치찌개 끓이는 과정과 비슷했다. 내가 원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부족한 점이 눈에 보인다. 이 부족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다른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부분이 부족해서, 그 부분을 개선하고 보니,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라는 것을 반복해서 깨닫는 과정이 수업 성장의 과정이었다.
첫 번째 실패 
처음 교사가 될 때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은 ‘쉽고 재미있는 수업’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학창시절 경험한 좋은 수업이 바로 ‘쉽고 재미있는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중간 중간에 유머를 넣어서 아이들이 ‘빵빵터지는’ 수업.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수업 정말 재밌지 않냐?”, “응, 그렇지.”라고 대화하는 수업. 그래서 다음 시간에 수업하러 들어갔을 때, 아이들이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는 수업. 이런 수업이 내가 하고 싶었던 수업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열심히 수업 준비를 했다. 어떻게 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준비를 많이 했고, 아이들은 설명을 경청해주었다. 설명 중간에 던지는 농담이나 장난도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고, 수업이 지루해질 때면 내가 삶에서 경험했거나 들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었다. 유치원 시절 부모님께 누나와 함께 혼나다가 나만 도망쳤던 경험부터 군대에서 겪었던 고문관 이야기까지, 아이들은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빵빵 터졌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수업 종료 10분을 앞둔 상황에서 시계를 보더니 “뭐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라는 말을 하는 걸 보고, 나는 내 수업에 흡족했다.
그런데, 딱 두 달까지였다. 유머의 소재가 바닥나자, 수업은 급격히 가라앉았다. 설명이 길어져 수업이 지루해질 때면 아이들은 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는데, 소재가 떨어져 더 이상 해줄 수 없었다. 중간 중간에 치는 드립, 유머, 장난도 래퍼토리가 익숙해지자 재미가 없어졌다. 아이들의 눈빛이 점점 지루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그 눈들은 그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하나둘씩 감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수업 자신감도 떨어져갔다.
두 번째 실패 
유머로 수업을 재미있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수업 자체’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유머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교사는 개그맨이 아니다. 드립, 농담, 장난으로 수업에 활력을 넣겠다는 생각 자체를 반성하게 됐다. 수업 자체를 재미있게 설계하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수업’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 한 선생님으로부터 ‘골든벨 수업’ 자료를 받았다. 당시, 글을 끝까지 잘 읽어내지 못하는 중학교 2학년과 어떻게 하면 소설 수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나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은 자료였다. 수업의 흐름은 이렇다.
①아이들이 단편 소설을 읽으면서 각자 문제를 5개씩 출제한다.
②교사는 학생들의 문제를 취합해서 골든벨 문제로 만든다.
③모둠별 골든벨 대회를 열어서 아이들이 소설 문제를 맞히게 한다.
④1, 2, 3등 모둠에 대해서 간식으로 시상을 한다.
아이들은 골든벨 문제를 직접 내면서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대부분 집중해서 단편 소설을 다 읽어냈다. 자기가 낸 문제가 골든벨 문제로 나온다는 생각에 열심히 문제를 냈다. 아이들이 낸 문제 중 좋은 것을 바탕으로 골든벨 문제를 30개 냈고, 아이들은 매우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골든벨 퀴즈 대회에 임했다. 수업이 끝날 때에는 아이들이 “다음에 또 해요.”와 같은 말을 해주었고, 나도 매우 만족했다.
하지만 이 수업에서 고민이 생겼다. 소설의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아이들이 이해했을까? 흥미위주의 게임식 수업이 아닐까? 이 수업에서 주로 다뤘던 것은 소설의 사실적 내용이었고, 아이들이 추론하고 상상하고 공감해야 알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이 수업을 받은 아이가 나중에 소설을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실패 
이제 수업에 재미와 함께 ‘의미’를 더하고 싶었다.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의미가 없으면, 수업이 끝나고 나서 교사로서의 허탈함이 있었다. 교사로서의 자기만족만을 추구한 것 같아서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이렇게 재미도 있으면서 의미 있는 수업을 고민하던 중, 만난 수업 방법이 ‘하브루타’ 수업과 ‘토의토론’ 수업이었다.
교사가 수업에서 추구하는 의미는 교사의 성장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하는데, 내가 당시 추구했던 ‘의미 있는 수업’은 학생들이 스스로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의미를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수업이었다. 내가 학창 시절 받았던 국어 수업은 주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필기하고, 암기하고, 정확히 읽고, 수능 문제를 푸는 수업이었는데, 이런 국어 수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수업은 지식을 정확히 기억하고 다시 끄집어내는 능력은 키워줄 수 있지만, 더 높은 수준의 언어 사용 능력은 길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학생들이 실제 삶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언어사용능력을 길러주고 싶었다.
하브루타 수업은 텍스트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생성하고, 그 질문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지식을 탐구하고 텍스트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하는 수업이다. 질문하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는 과정이면서도,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복합적인 언어사용기능을 익히게 되기 때문에 의미도 있는 수업이었다. 이 수업 방법이라면, 내가 원하는 수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심차게 준비한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의 하브루타 토론 수업. 많은 문제점이 노출됐다. 아이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다른 모둠의 친구와 장난을 치거나, 토론 중간에 서로 싸우거나, 멍하니 가만히 앉아 있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다투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먼저 하라고 하면서 싸우거나, 친구의 의견에 빈정대는 아이 때문에 다퉜다. 자신과 다른 의견이 있으면 중간에 말을 끊고 반박했고, 그것 때문에 또 싸워댔다.
물론, 나름대로의 성과도 있었다. 서툰 토론이었지만 자기 나름대로 텍스트의 의미를 재구성해서 글로 표현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양한 친구들과 만나서 질문하고 토론한 후 쓰게 한 감상문에서 아이들은 각자 고유한 자기만의 생각을 쓰기도 하고, 교사가 설명해주지 않은 시의 주제를 타당하게 찾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싸워대는 문제는 고민거리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 수업은 의미있는 수업이 되기 어려웠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하던 중, ‘협동학습’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사회적 기술’이라는 챕터를 보게 되었고, ‘사회적 기술’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됐다.
(2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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