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생각하는 사회 수업
서덕원(고덕중학교 역사/사회 교사)
1_수업의 지향점
어쩌다 보니 읍면 소재지의 작은 학교에만 8년째 근무 중이다. 이런 학교의 장점이라고 하면 아이들에 대한 생활 지도가 확실히 잡혀있다는 점. 단점이라면 모두가 가족 같다는 점. 작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서로의 부모가 친구들이다. 속속들이 집안 사정을 알기 때문에 어른들의 말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학교에서 유일하게 뜨내기인 교사들에게 이모, 삼촌처럼 바라는 것들이 많다.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가족 같은 학교라면 장점이지 않겠냐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너무 잘 알아서 상처를 주기도 쉽다는 것.
반에서 친구들끼리 엎치락뒤치락 싸워도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채 다음 해로 진급하는데, 그 친구와 또 같은 반이다. 학교가 가족이라면 형제자매들끼리 편을 바꿔가며 싸우는 편이다. 그리고 자녀 같은 학생들은 이모나 삼촌 같은 선생님들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활동도 “선생님, 이거 어떻게 해요?”, “도와주세요.”라고 말을 걸며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 학교 아이들은 사랑만 잔뜩 받은 소극적인 금쪽이로 커 버렸다. 그래서 내 수업의 지향점은 이것이다.
1.
타인을 생각하자. (내 이야기만 말고 남의 이야기도 경청하자, 제발)
2.
조금 똑똑해지자. (모두가 똑똑해질 수 있다는 강한 희망)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프로젝트 수업을 떠올렸다. 3학년 사회 교과에 있는 ‘헌법과 국가기관-국회’ 부분에 있는 내용을 심화해서 국회의원을 모의 경험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과 제도를 앞세우며 많은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정작 사회적 약자는 누구일까? 이들을 위한 법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세상의 강자에 의해 가려진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하는 법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나고 자란 동네가 작아서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접하지 못한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들을 쉽게 타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단원의 내용 지식적인 측면만을 다뤄 진도만 빠르게 뺄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사람의 선함을 법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함께 모의 법안 만들기 활동을 전개했다.
단절적인 사회로 점차 변질되어 가지만 사람의 선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보다 남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우리 아이들이 사회적 약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기에 이들을 위한 보호 테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이 수업을 통해 아이들도, 그리고 수업을 준비한 나도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2_성취기준 및 탐구 질문
‘사회적 약자를 위한 나라 만들기’ 프로젝트 수업은 다음과 같은 성취 기준을 배경으로 실시한다. [9사(일사)07-01] 입법기관으로서 국회의 위상을 이해하고, 국회의 주요 조직과 기능을 조사한다.
평소 여러 성취 기준을 포함해 프로젝트 수업을 계획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하나의 성취 기준만을 겨냥해 문장 너머에 숨은 메시지를 수업안에서 풀어나가고 싶었다. 프로젝트 탐구 질문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소위 신체,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되거나 열악한 이들을 일컬어 사회적 약자라고 규정한다. 사회적 약자는 대부분 소수이고 상대적으로 인권 침해를 많이 받는 편이다. 사회적 약자는 누구나 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약자적 성향을 찾아보고 모둠별로 법안을 만들어, 적극적 피드백 활동을 거쳐 국회의원의 역할을 대리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 과정 중에서 자연스럽게 비판적 사고력, 의사소통 및 협업 능력 등 사회 교과에 필요한 역량이 길러지리라.
3_프로젝트 흐름
(1차시) 모둠 구성하기, 사회적 약자 경험하기 활동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먼저 모둠을 구성했다. 학기 초반에 인구정책 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아이들도 어느 정도 에너지가 소진되었다는 판단이 들어 새로 모둠 구성을 하였다. 아이들의 추천으로 모둠장이 될 만한 친구들을 뽑고, 이 모둠장(눈) 친구가 다른 친구들을 골고루 뽑아가는 형태이다. 눈, 입, 귀, 손, 코 등 다양한 역할을 배정받은 아이들은 모둠명을 병맛으로 지은 후 프로젝트 계획에 따른 법안을 제정하고 검토한다.
모둠으로 앉은 아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다. 그런데 정작 미성년자인 자신들을 사회적 약자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두루뭉술하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미를 짐작하게 한 후 바로 흥미 유발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사실 수업 중 흥미 유발을 위해 많이 애쓰지 않는 편인데, PBL 센터에서 다행히 꿀팁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아이들이 짧은 동기유발 활동에도 굉장히 즐거워했다.
동기유발
먼저 사회적 지위를 적은 포스트잇 18개를 전체 학생들 등 뒤에 무작위로 붙이고 자기 지위를 모른 채 대화 나누기 활동을 전개했다. 참고로 포스트잇에 적힌 사회적 지위는‘혼자 아이를 키우는 10대 엄마, 비건 식단을 고수하는 채식주의자, 코인으로 대박 터진 20대, 활동 후 시리아 난민, 대장암 말기 20대 환자’ 등으로 구성했다. 아이들은 자기 등에 어떤 사회적 지위가 적혀 있는지 예측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친구들을 대할 때 감정이 어땠는지 소감을 발표하며 공유하였다. 어떤 이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인 것 같다.”, 또“계속 응원만 받았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후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사례를 모둠 안에서 적어보고 이에 따른 문제 상황을 토의하여 공유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최대한 많이 제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이들은 이전 동기유발 활동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법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활동지
(2차시) 법안이 만들어지는 과정 및 탐구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으로써 국회에 관해 탐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창 국회의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싹틀 때라 더 조심스러웠다. 국회의원은 정책의 바탕인 법안을 만드는 기구이기 때문에 법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빈틈이 많은 법을 만듦으로써 잘못된 정책 시행까지 갈 우려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국회법률 정보시스템에서 매년 제·개정되는 수백 개의 법률을 확인한 아이들은 국회의원이 의외로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놀라는 눈치였다.
법안 만들기의 갈피를 못 잡는 아이들을 위해 법안 예시를 준비했다. 우선 법안의 기본 틀인 ‘법안 제목, 발의자 및 찬성자, 제안 이유, 주요 내용, 조문, 부칙’ 등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을 간단히 제시하고, 매년 열리는 ‘대한민국 어린이 국회 연구회 활동 기록’ 중 우수 안건을 사례로 들었다. 어린이들이 만든 법안보다는 수준이 높길 바라는 마음에 2024년도 실제 발의 중이었던 국회의원 법안을 예시로 또 하나 들었다. 아이들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지만 다음 차시부터 구글 슬라이드를 기반으로 교사의 피드백이 꾸준히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였다.
법안 토의
(3-5차시) 타인을 위한 법안 만들기 모둠 탐구활동
중3 친구들은 고입을 앞두고 있어서 수행평가나 진도에 속도를 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8, 9월에 폭풍 진도를 나가고, 예고한 프로젝트 수업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기대감 반, 두려움 반이었던 것 같다. 프로젝트 수업 준비 시 걱정했던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첫째, 현행법을 그냥 베끼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는 점, 둘째, 완성도가 높지 않은데 아이들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중간에 멈출 수 있다는 점, 셋째, 열심히 하는 아이들에게 무임승차 하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셋을 위해서는 건강한 모둠 활동이 꼭 필요하다. 조금 불안한 모둠도 있었지만, 더 많이 피드백하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차시에 가닥을 잡았던 법안 사례들과 2차시의 법안 제·개정 절차를 토대로 아이들에게 법안을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프로젝트 수업에서는 탐구활동이 제일 막막한 편이라 모둠을 순회하며 약간의 팁을 줬다. 어떤 사회적 약자의 경우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접근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례 위주로 독려했다. 그래도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AI를 활용하라고 하고, 질문을 작성하는 법을 안내하며 AI가 제시한 법안 예시에 대한 학생의 이해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점검했다. AI는 중학생 아이들보다 과하게 수준이 높아서 법안을 만들 때 포함해야 할 주요 내용 정도로만 아이들이 쓸 수 있도록 재안내했고 어느 정도 법의 핵심에 접근하도록 지시했다.
3학년 두 학급에서 만들어진 모둠별 법안은 다음과 같다.
가) 청소년 부모의 일자리 마련 법안
나) 경계선 지능 장애의 기준 및 처우개선에 대한 법안
다) 탈북민을 위한 주거 환경 지원 법안
라) 촉법소년 연령 및 범죄행위 처벌 강화에 대한 법안
마) 교권 강화 및 보호를 위한 권위적 보호자 규제 법안
바) 교권 침해 가해자의 처벌 수준 강화에 대한 법안
사) 학교 폭력 처벌 강화 법안
아) 무연고 사망 위험자의 삶의 질 개선 및 고독사 예방에 관한 법안
학생의 눈높이에서 대부분 학교를 주 무대로 한 법안이 많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접하기 어려운 분야인 경계선 지능 장애, 무연고 사망 위험자, 탈북민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사례도 나와 중간중간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수업을 준비하며 내가 역사 교사인 것을 잠시 후회했다. 생각보다 법은 너무 어려웠고 더 꼼꼼히 아이들에게 피드백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법안 작성은 모둠별로 구글 슬라이드에 적게 했다. 디자인에 치중하지 않게 하려고 단색의 슬라이드 디자인으로만 제시했고, 모둠장(눈)이 발의자, 모둠원 3~4명이 찬성자로서 법안을 발의하게 하였다. 모둠원별로 각자 쓸 수 있는 만큼만 슬라이드를 적게 했고, 한국어가 미숙하거나 학습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슬라이드 앞장, 부칙, 또는 법안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서 적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쓴 법 조항이나 슬라이드 각 장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이것으로 무임승차는 예방했다.
현행법을 그냥 베끼는 수준에 그치는 모둠은 다행히 없었다. 현행법 자체가 평소에 쓰지 않는 어려운 어휘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기 피드백으로 다 걸러낸 덕분이었다. 문제는 완성도가 높지 않은데 그냥 만족하고 중도 포기하는 모둠에 있었다. 법안 1차 발표를 계획한 수업 직전까지 아이들에게 피드백으로 포장한 잔소리를 뱉으며 모두 점검해서 수정하도록 하였다. 학생 프로젝트 산출물인데 왜 그렇게 마음 졸이며 내 산출물인 것처럼 피드백했는지 모르겠다.
법을 어느 정도 잘 만들어가는 중이던 모둠에서도 고성이 오갔다. 모둠장(눈)이 법안을 잘 만들고 싶은 욕심에 모둠원들을 닦달하다가 마음이 서로 상한 것이다. 그래서 우선 ‘눈’에게 국가 수준의 법안이라면 세세하게 많은 내용이 들어갈 필요가 없으며, 대부분의 구체적인 일들은 하위 법안이나 정책으로 보완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13장 넘어가는 법 조항의 일부를 지우게 했고, 아이들은 도끼눈이었다가 꺾인 ‘눈’의 눈치를 보며 자기가 맡은 장들을 완성해 나갔다. 체계가 없는 법안, 주요 용어의 중의성, 주요 내용과 법조문의 불일치, 오탈자 정도는 어렵지 않은 피드백에 속하는 편이었다. 법 시안 1차 발표만을 앞두고 있었고 아이들은 1차 모둠별 산출물을 제출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6차시) 법 시안 1차 발표 및 타모둠 동료 피드백
마치 국회의장이 된 듯한 포즈로 아이들 앞에 진지하게 섰다. 아이들에게 ‘국회의장으로서 지금 제 손에는 발의된 법안이 들려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리며 입법 절차 과정 중 이번 시간은 발의된 법안을 검토하는 ‘상임위원회 및 법제사법위원회’의 활동으로 진행될 것이라 안내했다.
이번 차시를 계획할 때도 우려한 바가 또 있다. 아이들이 타 모둠의 법안에는 무관심할 수 있다는 점과 타 법안의 오류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발견해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차시를 더 꼼꼼히 계획했다. 학급 당 세 모둠의 법안을 띵커벨 보드에 공유하고 이를 모두 눈으로 훑게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바른 질문을 하는 방법을 영상과 함께 안내했다. 띵커벨 보드에는 간략한 핵심 질문만 적게 하되, 배부한 활동지에는 분량 1분에 해당하는 기자(?)식 바른 질문을 적으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것도 수행평가 영역에 넣어 점수를 준다고 했다(그래야 아이들이 열심히 하니까). 질문 분야를 1. 우선 요약 정리한 후, 2. 법안에 대해 알고 싶은 사항, 현 정책 추진 상황과 문제점, 개선 방향 등을 포함한 질문을 적고 3. 질문과 함께 나름의 대안, 해결책 및 개선책 제시, 정부의 수용 가능성을 확인하는 대안 제시를 기록하라고 하였다. 아이들의 얼굴이 흑색이 되어 갔지만 ‘배움 넘어 깊이 있는 탐구’로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활동이었다. 알찬 질문을 많이 올릴 수 있도록 띵커벨 보드 링크를 구글 클래스룸에 올리고 아이들이 시간 날 때마다 적도록 하였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다른 학교 아이들과 달리 너무 순하고 착한 편이다. 선생님에게 대들지 못하고, 모두가 Yes 할 때 No 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많이 의존하는 편이고, 친구들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해 학기마다 편을 가르며 소리 없이 싸운다. 이런 성향의 아이들에게 사회 시간을 빌려 ‘질문할 수 있는 자세와 비판할 수 있는 깡’과 ‘고차원의 사고력’을 기르게 해주고 싶다. 이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이 진짜 국회의원처럼 첨예하게 질문하고 대답하며 건강하게 싸웠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들었다.
질문 점검
(7-8차시) 2차 법안 발표 및 토론회
해당 차시 시간에는 아이들만큼 나도 많이 떨렸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내 수업 공개를 하겠다고 예고를 했기 때문에 주변 학교에서 몇몇 선생님들이 찾아오실 예정이었다. 이 불완전한 법안들을 노출해야 한다는 걱정에 더해 자기 집 마당에서만 겨우 소리 낼 줄 아는 소극적인 아이들이 제대로 법안 발표를 할 수 있을까 저어됐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계획대로 수업은 진행했다. 교내 선생님들도 많이 들어오셨다.
우선 모둠원들이 모두 나와 무난히 법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과 조문 요약까지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칠판에 띄어놓고 같이 읽어 내려갔다. 발표 모둠은 띵커벨 보드에 올라온 질문에 준비된 대답을 했고 막힘이 없었다. 이에 더해 예고한 대로 다른 모둠을 향해 즉석 질의를 던지라고 했다. 보드에 질문을 올린 학생들에게 즉석 질의를 하도록 독려했더니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질문했다.
질문을 던진 친구는 덤덤한데, 법안을 발표한 아이의 목에 핏대가 올라섰다. 자신들이 힘들게 만든 자식 같은 법안이 공격을 받아 화가 난 모양이다. 1차 발표 이후에는 법안별로 교사 피드백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보드 질의 이후에 수정하지 않은 부분들이 주로 공격받았다. 타당한 공격이면 법안의 잘못을 인정하는 편이었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면 오히려 역공을 가했다. 무슨 의도로 질문을 이렇게 했는지 되묻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국회의원의 얼굴을 보았달까. 초반의 격렬한 질의응답에 더 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국회의장으로서의 중립성을 버리고 타 국회의원으로서 송곳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발표하는 아이가 날을 세우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참 잘했구나 싶었다.
1차시의 수업만으로 발표가 완료될 줄 알았지만, 아이들의 토론은 격렬해져 2차시까지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순한 양 같은 아이들 속 포악한 호랑이의 얼굴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들의 학력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서 이전에 너무 쉬운 탐구 과제들만 준 것이 아닌지 후회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섯 개의 법안에 대해 열띤 토론 후 본회의로 상정해 찬반 투표를 하도록 진행했다. 법안 중 제정 의도와 내용이 좋거나 혹은 내용은 불충분하지만 유의미한 법안이라면 찬성에 투표해달라고 말했다. 여섯 개의 법안 중 4개가 통과되었다. 1차 발표 후 점검 사항이 미반영된 모둠이 부결되었다.
법안 슬라이드
본회의 투표
2차 발표
(9차시) 성찰
마지막으로 소소하게 과자 파티를 하며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젝트 수업 활동으로 얻은 교훈이나 소감을 적어 보며 솔직하게 담소를 나눴다. 알찬 프로젝트 수업일수록 끝난 후 여운이 길다. 아이들은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나 보다. 수업 전 아이들은 대부분 법안 만드는 것 자체에 대한 어려움에 지레 겁을 먹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일을 모둠원들과 함께 생각하고, 토의하고 싸우며 법을 완성했다는 만족감까지 얻었다는 소감이 많았다. 2시간에 걸친 토론으로 발표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낸 친구도 있고, 모둠장으로서 모둠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한숨을 쉰 친구도 있었다. 국회의원의 일은 생각보다 매우 힘들었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법안에 대해서 기대를 품은 친구도 있었다.
프로젝트 수업의 핵심은 산출물 공개와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기대, 불안, 자책, 갈등, 아쉬움, 만족감, 희망 등 다양한 감정을 품는다. 수업을 디자인하면서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나도 성장했다.
띵커벨 보드
4_ 수업 후기
2023년도부터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PBL 센터를 찾는다. 운전길 푸르고 화창한 하늘을 볼 때마다 피 같은 주말에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아가야 할지 의아한 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열정적인 선생님들과 PBL 수업을 디자인하다 보면 얼른 수업에 적용해 보고 싶다. 특히 개학 전 PBL 센터가 최고다. 동료 선생님들의 피드백을 참고하여 퍽 마음에 들게 된 수업 계획은 개학일마저도 기대감에 부풀어 기다리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이번 수업도 선생님들의 조언과 피드백이 큰 도움이 되었다.
재미가 있는 수업은 아니었다. 의미를 찾기 위한 수업이었다. 학생의 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주제도 어려워 모둠 활동을 할 때에 문제가 다수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지만, 어쨌든 아이들이 끝까지 잘 따라와 줘서 다행이었다.
발표회 중 즉석 질문을 할 때였나 보다. 내가 ‘경계선 지능 장애의 기준 및 처우개선에 대한 법안’ 모둠에 질문을 던졌다. ‘이 법대로 한다면 경계선 지능 장애의 처우가 과하게 개선되어서 기존의 장애가 있는 사람 편에서 역차별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겠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모둠의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법은 지금 보면 역차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한다. 하지만 현재 경계선 지능 장애에 관한 법이 없기 때문에 선결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법이 만들어진 후 장애인에 대한 법안도 개정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적 약자를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법안을 만드는 것이 이번 수업의 목적이 아니었느냐? 그래서 나는 이 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답한 아이의 마음이 교사의 마음보다 크고 넓고 깊었다. 아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수업에 참여했던 모두가 한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 한마디로 이번 수업은 충분히 의미 있는 수업이었다.
서덕원
아이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넘어 깊이 생각하는 수업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주변에 흔히 보이지만 무엇보다 오래 살며 주변을 빛내는 느티나무처럼 수업 속에서나 삶 속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열의를 갖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