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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별 수업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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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 아이에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 있다

어쩌면 그 아이에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 있다.
아마 교사가 된 지 8년이 되었을 때인 것 같다. 1학년 담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5월 초가 되었을 때 자퇴를 하고 싶다며 그 아이가 나에게 찾아 왔다. 가끔 지각은 했지만 비교적 성실하고 예의도 발랐으며 성적도 좋은 편인 아이였기 때문에 좀 놀라서 이유를 물었다.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자신에게 시간 낭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좀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눠보니 자기는 카페를 하고 싶은데 지금부터 자퇴하고 돈을 벌면 좀 더 일찍 카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은 시간을 두고 좀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 했고, 아이도 나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좀 더 고민해보겠다고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아이와 이야기 나눈 후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어머니도 아이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와 어린 동생과 함께 지내는 가정환경에서 아이가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리니 많이 속상해하셨다.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는 이야기 후에 통화를 마쳤다. 그래도 지켜보자는 약속을 지키고 아이는 한동안 학교에 다녔다. 6월이 되었을 때 아이는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여전히 학교생활은 낭비인 것 같으니 자퇴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께서도 아이가 너무 고집을 부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지금 너의 생각이 당장은 합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꼭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이야기를 해도 아이는 예의가 바르고 공손했지만,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후로 아이는 무단 지각에 무단결석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자퇴를 하고 싶은데 쉽게 되지 않으니 다니기 싫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게 아이의 학교생활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와의 계속된 실랑이 끝에 7, 8월에 하고 싶은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학교를 계속 다녀야겠다는 결심이 들면 2학기 개학 날에 등교하고 자퇴하기로 마음먹으면 자퇴서를 들고 오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아이는 무단결석과 방학기간 동안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2학기 개학일에 그 아이가 등교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어른들이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뭘 하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할 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는 거였다. 그렇게 아이는 자퇴하지 않기로 했다. 나와 부모님이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가끔은 자신과는 연관 없는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신뢰될 때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는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한번 망가진 학교생활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2학기 내내 무단 지각과 결석을 반복했고, 그렇게 실망스럽게 2학년이 되었다. 우리 반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가 있는 학급에 교과 수업을 들어갔고, 여전히 2학년 때도 고쳐지지 않는 무단 지각과 결석, 결과를 보면서 ‘어쩌면 1학년 때 자퇴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렇게 3학년이 되었고 아이는 내가 담당한 학급의 옆 반에 배정받았다. 학기 초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찾아왔다. 옆자리에 계신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셨기에 담임 선생님을 뵈러 온줄 알았지만 날 보러 온 것이었다. 나에게 이제 3학년이 되었으니 그동안의 모습은 버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곳에 취직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정말로 3학년이 되어선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때론 큰 동기가 없어도 그저 3학년이니깐, 취업해야 하니깐 같은 너무나 당연한 동기로도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데 이 아이가 정말 그랬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무엇보다 생활 태도가 좋아졌다. 취업을 위해 원서도 열심히 썼다. 하지만, 1, 2학년 때의 불성실한 출결과 떨어진 성적이 항상 걸림돌이 되어 원하는 곳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하는 모습에 담임 선생님과 나,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격려했고, 열심히 원서를 넣고 취업을 하고 졸업했다. 1학년 때 함께한 경험이 서로 각별했는지 졸업 후에도 생각나고 가끔은 학교에 찾아와 얼굴도 보고 갔다.
아이와의 경험 이후로 담임으로 지내면서 속을 썩이는 아이들을 만날 때
“그래, 지금은 이렇게 속을 썩이고 말썽꾸러기지만 언젠가 자기 인생을 위해 정신 차리고, 졸업하면 또 잘 지낼 수 있겠지, 그러니 혼내고, 달래고, 이야기해서 잘 데리고 가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시는 선생님들께도 가끔 이 아이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렇게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오후 이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지내냐? 잘 지내냐? 몸은 괜찮니? 등등 몇 마디가 오가고 아이는 솔직히 지금 사는데 너무 힘들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군대 제대하고 취업하고 싶어도 잘 안되고, 그래도 어떻게 일은 일대로 열심히 하는데 돈은 안 모이고, 우울증에 병원 다니면서 지내는데 사는 게 힘들어서 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선생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요?”라고 말하는데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속상하고 슬펐다. “괜찮니? 많이 힘들면 학교 놀러 와 급식 사줄게, 와서 다른 선생님들도 뵙고 하면 우울한 게 좀 나아지지 않을까? 세상 사는 게 참 쉽지 않아서 속상하다. 그랬구나.. 힘들구나..” 그렇게 몇 분 더 속상하다고 말하다가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고 이렇게 전화해서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한참을 통화의 여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후로 아직 아이와 통화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내면서 문득문득 잘 지내는지 궁금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떠오른다. 잘 지내면 좋을 텐데, 어쩌면 그 아이에겐 고등학교 생활이 지금까지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내지 못해도 괜찮으니 잘 버티기만이라도 하면 좋겠다. 그렇게 지내면 다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포기하지 말고 잘 지내라. 괜찮아.. 괜찮아..’
언젠가부터 사회적으로 교육적으로 아이들에게 방어적으로 대하는 나를 발견한다. 너무 방어적이라서 아이들을 쉽게 포기하게 되기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도 학생들을 쉽게 포기하진 말아야겠다. 지금이 나를 속 썩이는 그 아이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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