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소리 읽기
home
교과별 수업 및 평가
❤️

사랑의 씨앗

새벽이다. 이렇게 일어나 책상에 앉은 것이 어연 2년만인 듯하다. 곧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초임 교사 시절 나는 태안에 있었다.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는 곳이었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초과근무를 하는 일이 잦았다. 깜깜한 밤이 되어서 일이 끝나고, 시내 관사로 나가는 8시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못 다한 일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학교를 서둘러 나서고는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인터넷도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 방에서 지쳐 일찍 잠이 들었던 어느 날, 수업 걱정에 새벽 일찍 일어나 책을 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을 어떻게 특별히 기억하느냐 하면 내가 종종 보는 그날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 화장까지 마치고 책을 편 내가 대견한 나머지 셀카를 찍었다.) 수업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얼마나 해야 할 지 참 많이도 헤맸다. 연수에서 듣는 대로 이것저것 시도해봤지만 수업은 매번 오락가락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초임교사에 대한 배려로 업무도 비교적 쉬운 일을 했고 담임도 아니었지만 참 버거운 적응의 2년을 보냈다.
학생들과의 관계도 쉽지 않았다. 실력과 내공에 비해 주고 싶은 사랑이 많았다. 교사가 된 첫해 중학교 1학년이었던 아이들에게 그런 사랑을, 마음을 주었고 그럭저럭 즐거운 1년을 보냈다. 그 아이들이 2학년이 되었을 때, 인정하기 너무도 뼈아프지만, 나는 부들부들하고 친절하기만 한, 친구 같은 만만한 교사가 되었다. 내 인격은 숨김없이 드러났다. 수업 안에서, 수업 외에서, 학생들과 밤을 보내는 기숙사에서. 1학년 때 착하게만 보이던 아이들이 2학년이 되어 자신 안에 있는 온갖 것을 쏟아내는 정글 같은 학교. 그곳에서 내 성격의 한계가 스스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학생들도 느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계를 느끼는 나’를 느꼈을 것이다. 발가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학생과의 관계에서 ‘경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그때도 들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경계는 처음부터 세워야 하는 것이었다.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그곳이 경계가 되었다. 무너진 경계를 다시 세우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실패를 안은 채 천안으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 학교에서 환영회가 열렸다. 선배교사와 환영식에 동승하던 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직 아물지 않았던 마음의 생채기에 대해 털어놓게 되었다. 선배교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언제 꽃이 필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는 씨를 뿌릴 뿐이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사랑의 씨앗을 심은 거야. 어떤 아이의 마음에는 늦게라도 꽃이 필거야.’
그리고 얼마 전이다. 오랜만에 태안에서 만났던 학생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이OO학생입니다. 기억하세요? 저 이제 회사 다녀요. 주욱 전화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 용기를 냈어요.’ 4년도 더 되어 듣는 목소리였다. 학교에서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이내 남이섬이 생각났다. 체험학습 날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신나서 여기저기로 퍼져갔는데, 한 친구와 아무것도 못하고 한참을 쭈뼛쭈뼛하던 아이. 그래서 자전거라도 타라고 등을 밀었는데 돈 때문에 망설이기에 대여료를 대신 내주었었다.
안부전화를 마치고 폰을 내려놓으며, 내 입술에 씨익 미소가 번졌다. 줄 것이 많지 않은 서툰 사랑을 주던 시절, 그래도,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새 그 아이 마음에 작은 꽃이 피었구나. 그리고 곧 태안의 다른 아이가 생각났다. 초임학교의 까만 남자아이, 나를 부단히도 괴롭게 했던 아이. 그 아이를 이해하기에도, 이끌어가거나 다독이기에도 나는 너무 부족했었다. 그 학생의 마음에도 누군가의 사랑으로 부디 꽃이 피었기를, 피어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해본다. 그리고 나는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요령을 쌓고, 의미있는 수업을 하고, 신뢰를 받으며 성공과 실패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목차로 돌아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