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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신박한 정리

학교의 신박한 정리

이수진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진심이 채워지는 신박한 정리가 우리 학교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집을 정리해 주는‘신박한 정리’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있다. 처음에는 정리 비결을 배워 지저분한 내 집을 어떻게 좀 해볼까 하는 마음에 시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회 보니 정리 방법은 덤이었고 더 중요한 것에 마음이 끌렸다. 가구를 살짝 옆으로 재배치했을 뿐인데 공간이 제 기능을 찾고, 필요 없는 물건을 비우니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고, 하고 싶던 취미 활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인테리어 공사를 하거나 새로운 가구를 사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물건 한에서 비우고, 재배치했을 뿐인데 그 공간에 사람이 보이고 내면 깊숙하게 있던 진심이 올라온다. 집이 깨끗해져서만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사람이 보이고 사람과 사람 관계의 진심이 채워지는 신박함에 출연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진심이 채워지는 신박한 정리가 우리 학교에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의 신박한 정리라고 하니 학교 공간 혁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공간을 넘어 우리가 학교에서 비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비운 자리에서 어떤 진심을 채워야 할지를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비움 -욕구 상자에 담아 버리기-

앞에서 말한 신박한 정리의 첫 번째 정리 방법이 ‘필요’와 ‘욕구’를 구별하는 것이다. 정리에서‘필요’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이며, ‘욕구’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욕심에 소장하고 있던 것들을 말한다. 출연자들은 욕구 상자에 물건들을 담아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할지, 말지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욕구 상자를 많이 담고 비울수록, 아이의 공부방이 생기고, 꿈을 향한 공간이 생겨 그 비움에 후회가 없다. 오히려 방송 촬영이 끝나고 더 비우겠다고 한다.
학교에서 ‘필요’와 ‘욕구’는 무엇일까? 학교에서‘필요’는 학생 성장을 위한 교육 활동이며, ‘욕구’는 교육 활동을 저해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욕구’를 비워내고 그 자리에 ‘필요’로 채워가야 신박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럼 욕구 상자에 무엇을 담아 볼까? 권위를 지키기 위한 불필요한 절차들, 성과 중심의 보여주기식 행사들, 교사 편의 중심의 교육과정, 학생 줄세우기식의 교육 접근들……. ‘그래도 이 업무는 해야지’, ‘일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아야지’, ‘우리가 좀 편하면 어때’, ‘우리 학교 학생들은 원래 못해’, ‘입시 앞에서 우리가 뭘 해’라는 생각들이 커서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욕구’가 마치 ‘필요’인 듯 학교 가운데를 자리 잡고 있어서 학교와 교사의 진짜 역할, 그 진심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한번은 욕구 상자에 담아 보며 필요와 욕구를 구별해 보았으면 한다.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업무 덜어내기’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전 교사가 모여 1년간 자신이 했던 업무를 포스트잇에 적고, ‘교육적인 것’, ‘교육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 ‘교육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것’ 3가지 기준으로 구별해 보았다. 그때 우리는 불필요한 업무 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없애기를 실천하였다. 비교육적이었지만 차마 업무 담당자 입에서 거론하기 힘들었던 관행이 전 교사 민주 협의를 통해 수면으로 떠 오르게 되었고, 그 문제는 담당자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 욕구 상자에 담아 버릴 수 있었다. 그 리스트에 있던 모든 것들이 버려지진 않았지만, 우리에겐 ‘필요’와 ‘욕구’를 구별하는 문화가 생기고, 그 힘은 교육과정을 세울 때마다 작용하였다.
나는 올해 ‘생활기록부에 적어줄 테니 활동지를 작성하렴’이라는 말을 욕구 상자에 담아 버렸다. 학기 말에 아이들에게 학교 폭력을 주제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며 ‘얘들아, 생활기록부에 작성할 테니, 활동지에 너희들의 생각을 적어줘’라고 했으나 절반 가량은 애니도 보지 않았고 활동지도 하지 않았다. 생활기록부에 기록할 내용을 억지로 만들고자 했던 나의 욕심이 그 수업의 본질을 흐리고 만 것이다. 실제 이 애니메이션을 수업에 활용한 이유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결국 서로에게 상처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했는데, 그 진심은 없고 생활기록부 기록용의 형식적인 수업이 되고 만 것이다. 다음 시간 아이들에게 이 수업의 진심을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의 진지한 눈빛이 나를 더욱 확신하게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아이들과 어떤 활동을 하든 그 진짜의 의미를 꼭 이야기해 준다. 오히려 아이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진다. 내가 굳이 아이들에게 생활기록부를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 결과물로 충분히 기록할 수 있었다. 3학년 2학기 우유 도우미 지원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우유 도우미라는 교육 활동을 하는 이유, 그 진심은 무엇일까? 아이들이 그 진심을 모른 채, 생활기록부 기록용 활동이라고만 알고 있으니 2학기에는 지원자가 없다. 우리 교육 활동 어딘가에 숨어 있을 진심을 찾아야 한다. 욕구 상자에 담아 버리면 마치 큰일 날 것 같지만, 버리고 나서야 흐려서 보이지 않았던 그 진심이 비로소 보일 수 있다.
<업무 덜어내기 활동 사진>

채움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

비웠으니 정리가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집은 물건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물건이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맞게 재배치 되어야 한다. 우리 학교에서의 정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들이 3년간 우리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나갈 것인지의 교육과정을 재배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교육과정을 다시 들여다보고, 이 지역에서 우리 학교 아이들은 어떤 시민으로 자라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우리 학교 3년을 다니면서 어떤 성장을 했는지가 그려지는 교육과정이 신박한 정리로 채워져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 비율이 전체 3학년의 20%도 되지 않는 학교의 교육과정이 수능 중심의 교과편성이거나 문제풀이식 수업이라면, 가만히 앉아 공부하는 것 보다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상위권 4%를 위한 수업이 진행된다면, 학생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교사 중심의 온라인 수업만 진행된다면, 우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다면, 교육과정의 재배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은 다양하다. 한 학급의 30명의 학생이 있다면 30가지의 생각이 있다. 이 다양한 아이들 한명 한명의 성장을 바라보는 교육과정이 학교 안에 채워져야 한다.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이제는 우리 학교 가운데 배치되어야 한다. 그동안 생활기록부 기록에 가려져 있었던 우리 수업의 진짜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코로나19 온라인 수업으로 학교의 역할이 분명해지고 있다. 지식 습득은 온라인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인성과 사회성, 공공성 교육은 결국 학교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대입 앞에 작아지지 말고 아이들의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성장을 중요시 하는 교육과정 재구성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교사 혼자 하지 말고 함께 하자. 혼자서 하기에는 어려운 일들일지도 모른다. 옆 반 담임교사와 함께 학급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해 보고, 같은 학년의 다른 교과 교사와 융합수업 및 수행평가를 디자인해보자. 전 교사가 모여 우리 학교와 아이들의 비전을 함께 논해보자. 학교 밖 학습공동체에 참여하여 우리의 고민에 답을 찾아보고 실천과 성찰을 반복해 보자.

신박한 학교, 우리 함께 가는 길

신박한 정리는 새로운 가구를 사거나, 새롭게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욕구를 버리고 필요를 재배치하여 사람이 보이는 정리를 한다는 것이다. 혁신학교가 바로 그러하다. 새로운 사업과 업무를 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존에 불필요한 것을 비우고 우리가 잠시 서랍 한편에 넣어 두었던 교육의 본질을 낯 간지러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끄집어내어 학교 가운데 배치해보자는 것이다.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수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힘을 배우는 교육과정. 그 교육과정을 구성하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실천하며 실패하여도 성찰과 고민을 통해 다시 실천하고자 노력하여 성장 과정이 살아 움직이는 학교, 바로 혁신학교이다. 지금은 혁신학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앞으로는 혁신학교의 모습이 학교의 당연하고 평범한 모습이 되어야 한다. 즉, 혁신학교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몫이며 지금 현시점에서는 많은 사람의 혁신학교에 관한 관심과 힘이 필요하다. 지금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있을 선생님의 시선에 힘을 얻는다. 혁신학교의 길이 더 이상 외로운 길이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 모두의 길이니까.
혁신학교는 기존의 교육과 더불어, ‘나’와 ‘우리’를 배우는 곳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 고민하며, 이를 확실히 이뤄나갈 자신감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는 학교입니다. 나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과도 소통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혁신학교는 암기와 경쟁이 학교 경험의 전부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우리 사회가 잊어버린 교육의 본질을 다시금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옆에 있는 소중한 친구가 인생의 동행자로서 함께 성장하며 존중받는 행복한 학교. 이것이 우리가 경험한 혁신학교입니다. 정치적 편향성을 지닌 학교도, 특정 생각을 하는 주체에 의해서 좌우되는 학교도 아닙니다. (혁신학교 졸업생연대 [까지] 2020 경원중 사태에 대한 혁신학교 졸업생의 호소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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