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와 햇볕
이미소(예산여자중학교 역사 교사)
학교에서 사안 조사를 하고, 다시 아이들을 살피고, 아, 팽팽 돌아간 뜨거운 머리. 축 처진 몸을 물이 식혀준다. 물은 차갑고 부드럽다.
귀를 날카롭게 찌르는 살이 물을 때리는 소리. 팔을 모아 물속으로 깊게 다이빙하는 풍덩 소리. 숨이 가빠 잠시 멈춰 거칠게 숨 고르는 소리. 출발을 알리는 휘슬 소리. 잠수하는 순간 사라진다. 코를 찌릿하게 하는 염소 냄새. 창문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 가지런히 꽂혀 있는 킥 판은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형광 분홍색.
사실 나는 교사라기보다는 땜장이다. 마치 플라스틱으로 솥을 때우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내가 꿈꾸던 ‘나’는 이랬다. 죽은 시인들의 사회 속 캡틴, 전형적인 착한 교사,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마술사. 하지만 매번 똑같은 공문을 쓰기, 하루 전날 수업을 준비하기,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교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기로 하루하루를 때우고 있다.
B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상담 교사다. 그는 상담실에서 학생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학생들의 고민을 귀담아듣는다.
그리고 작년까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천안으로 이동한 다정하고 열정적인 영어 교사 H. 우리는 시간이 나면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고, 요즘 핫플레이스에 놀러 가곤 한다. H의 집들이를 할 때 우리는 서로 화장해주기 대회를 열어 개그콘서트 ‘분장실 강선생’에 버금가는 화장을 해주기도 했다. 사력을 다해 학교에서의 근무를 마치면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각자의 퇴근길에 오른다. 나는 1시간이나 걸리는 퇴근길 대장정을 치른 후 수영장에 가거나. 일이 밀리면 야근을 하고 바로 수영장으로 향한다.
재작년 하반기는 학교폭력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내게 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시간이었다. 학교폭력 세 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관련 학생들은 스무 명에 가까웠다. 부장님께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시고 꼼꼼히 챙겨주셨지만, 머릿속에서 세 사안과 학생 진술이 뒤죽박죽되어 실수를 연발했다.
전화로 소리 지르며 심한 말을 하는 보호자를 상대해야 했다. 학교폭력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조회와 종례도 들어가지 못하고, 수업에 들어가서도 영화를 틀어주며 자괴감을 느꼈다. 틈만 나면 학교 구석에서 울고 벌게진 눈으로 교무실에 들어갔다.
H는 이런 나를 옆에서 다 지켜보았다. 당시 H는 나와 같은 2학년 담임이자 교무실 옆자리였다. 낯을 가리는 나는 먼저 말을 걸거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저경력 교사였기에 전문적 학습공동체나 흥미로운 연수만 있다면 신청해서 교사로서 능력을 신장시키고 싶어 했다.
내가 일 때문에 밥을 먹지 못하면 H는 간식을 조용히 내 책상 위로 밀어줬다. 학교폭력 업무로 바빠 야근하는 날에는 포스트잇에 ‘화이팅 내일은 주말이에요! 주말에는 일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요’, ‘애정하는 미소쌤. 저 먼저 가요. 너무너무 잘하고 있어요.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와 같은 메시지를 내 책상 위에 붙여놓고 퇴근했다. H는 나를 옆에서 여러 방법으로 지지해주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동료 선생님들은 직장 동료 그 이상의 관계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H에게 내 사적인 감정들을 풀어놓고, 이야기하면서, 위로받고 있었다. 옆자리 H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말하고 싶었다.
학교폭력이 점차 마무리되어 12월 후반부터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모두가 퇴근해 적막한 교무실에 H와 둘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크게 숨을 내뱉으며 오늘 하루도 정신없이 흘러갔다고 이야기를 했다. H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선생님 저도 사실 올해 정보업무를 하면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어요. 어깨는 무거운데 아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매번 죄송스럽다가도 서운하고, 슬프다가도 화가 나고, 학교생활이 참 어렵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컴퓨터 기사인지 영어 교사인지 모르겠더라니까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 와중에도 옆에서 나를 위로해주고 생각해준 H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내가 학교폭력으로 정신이 없었던 바로 그때 상담 교사인 B도 덩달아 바빠졌다. 학교폭력 업무 담당자와 상담 교사는 같이 협력해서 업무를 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B와 나는 사안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선생님. 이번 사안으로 피해 관련 학생들도, 가해 관련 학생들도 큰 상처를 받았어요. ‘내가 더 현명하고, 유능한 교사였다면 아이들이 이렇게 상처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B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선생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봤는걸요. 나머지는 그 아이들의 몫인 거지 선생님이 덜 현명하거나 유능하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B는 항상 나의 처지에서 진심으로 공감해 주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면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일에 허덕일 때는 내가 해야 할 업무 중 일부를 나눠 가져가며 도와주었다. B는 직장 동료에게 베풀 수 있는 친절 이상을 베풀어주었다. 상담실은 나의 상담실이 되기도 했다.
B가 나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해줄 때 나도 고마움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위로와 힘 나는 말을, 진심을 담아서 해주고 싶었다. 부정적인 감정에서 허우적거리느라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나를 B가 꺼내줬듯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H선생님이랑 천안에서 순대 먹으러 갈래요?” “좋아요!” 지금은 출근하는 날이 아니어도 선생님들을 학교 밖에서 만난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티룸에 방문해서 티코스 체험을 하기도 하고, 선생님들의 친구를 만나서 밥을 먹기도 한다.
“B 선생님이랑 생활교육연구소 같이 할래요?”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학교에서 고민을 풀어놓는다. 흥미 있는 연수 기회만 있으면 함께하려고 한다.
다시, 휘슬 소리. 수영장에 가기 전에 처음 산 수영복을 보고 경악했다. 생각보다 작고 착 달라붙었다. 평소에 입는 옷과는 전혀 달랐다. 탈의실에서도 샤워실에서도 부끄럽고 나를 드러내기 싫어 수건으로 내 몸을 가리고 다녔고, 수영장에 들어가면 물속으로 급하게 들어가기 바빴다.
수영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탈의실에서도 훌렁훌렁 옷을 벗고 편하게 샤워를 한다. 수영장 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물 앞에서 꼼꼼히 준비운동을 하기도 한다. 새벽 수영반에서 저녁 수영반으로 반을 옮기게 되었을 때 새로운 반의 분위기에 적응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긴장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겨주는 저녁 수영반 사람들의 따듯한 말과 표정에 왜인지 모를 힘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쭈뼛거리는 내게 먼저 수영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봐 주고, 오늘 컨디션은 어떤지 물어봐 주는 다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저녁 수영반은 직장에서 퇴근한 사람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영을 오는 경우가 많았다(회식이나 야근 때문에 오지 못할 때도 종종 있다.). 패딩을 뒤집어쓰고 비척비척 수영장에 와서 수영이 끝나면 가벼운 발걸음과 반질반질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른 반과 달리 저녁반에서는 서로 어려움을 느끼는 수영 동작을 봐주고 피드백해주기도 했다. 물론 실력은 도토리 키재기이지만, 물속에서 무아지경으로 팔을 돌리고 허벅지가 터지라고 발장구를 치며 앞으로 나갈 때는 객관적으로 내 동작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피드백은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같은 반에 있는 사람이 어떤 동작을 어려워하는지 어떤 영법을 좋아하는지 자연스레 서로를 이해하고, 어려움을 공감해 주었다.
다른 수영반에서 입 꾹 닫고 수영만 하던 나는 저녁 수영반에서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다. 내 나이, 직업, 우리 동네 어느 식당을 좋아하는지 어느새 모두가 알게 되었다. 나를 알아주는 좋은 사람들과 계속 수영하고 싶다는 생각에 퇴근 후 수영장 가는 길이 마냥 피곤하지 않았다.
B와 H를 만나면서부터 학교에서도 나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2021년은 여러모로 내게 힘든 해였다. 여럿이 연루된 학교폭력이 동시에 여러 건 터지면서 내 땜질 능력 이상의 금과 구멍들을 주변의 도움으로 꾸역꾸역 메우며 지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면 출근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며 사고가 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출근해서 교무실 문을 열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는 H, 업무 때문에 상담실에 방문하면 힘내라고 나를 토닥여주는 B 덕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동료 선생님들은 직장 동료 그 이상의 관계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 내 사적인 이야기들을 이야기하는 데 방어적인 태도로 관계에 임했다. 그러느라 나는 어디에서든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B 그리고 H와 함께 제주도에 와 있다. 함께하는 매 순간이 즐겁고 충만한 기분으로 가득하다.
외투를 꽁꽁 여미고 길을 걷던 나그네를 따듯한 햇볕처럼 받아준 B와 H.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을까? 앞으로도 서로에게 위로이자 힘을 주는 존재로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함께하고 싶다.
아이들을 보며 미소 짓고, 아이들을 미소 짓게 하는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