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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학교 PBL센터: 공동체성과 개체성

나무학교 PBL센터: 공동체성과 개체성

김정민(송남중학교 국어교사)

들어가며

사람을 정의할 때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뺄 수 없습니다. 어원이나 역사나 심리학 등 전반에서 뒷받침하는 논거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서로와 다양한 무언가를 주고 받는데 그 무언가는 물질적인 것부터 정서적, 정신적인 영역까지 다양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잘 구성되고 조직된 나무학교라는 학습공동체 안에서 이미 많은 역량을 갖추고 계시며 교실에서 많은 성장을 이루어내신 선생님들과 함께 공동체를 새로이 구성하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PBL센터 운영에 대한 생각을 묻는 원고 의뢰는 이미 오래전에 받았으나 그때는 거절했습니다. 생각이 완성되지 않았고 스스로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고, 단체와 공동체라는 것이 저의 바람 대로는 흘러갔지만, 전부 의도나 로드맵 대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입니다. PBL센터라는 공동체가 잘 되고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구성원들이 이미 훌륭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글을 쓰는 것이 사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저의 글이 사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이 글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만, 훌륭한 구성원들이 시너지를 내고 공동체의 추동으로 이어지도록 직관의 영역에서 열심히 고민했던 것들을 언어로 어느정도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공동체가 구성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구성원끼리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비법이나 비책, 혹은 절차 같은 것은 여기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몇 가지 주제와 저의 짧은 생각과 경험을 담아 두겠습니다. 제 글이 이야깃거리 정도 된다면 저의 목표는 달성될 것입니다.

이분법성과 이원성

이분법: 논리적 구분의 방법으로, 그 범위에 있어서 서로 '배척'되는 두 개의 구분지(區分肢)로 나누는 방법
이원론: 세계나 사상(事象)을 두 개의 상호간에 '독립'하는 근본 원리로 설명하는 입장
이원성: 모순되어 보이는 대상의 근본 원리 두 가지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다
왜 이 키워드를 꺼냈는지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PBL센터는 지금까지 오면서 수많은 논쟁과 결정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내렸던 결정의 기저에는 이러한 철학적 고민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저는 교육계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분법적 논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 공동체의 이야기를 미시적인 서사로 풀어내기에는 저에게 허락된 시간과 지면이 한정적이며, 추상적이지만 꽤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있으시다면 순전히 제 배움이 부족한 까닭일 것입니다. 최대한 명료하게 쓰고 싶지만 제 앎이 부족하여 쉽지가 않네요. 그래서 제 전언과 예상되는 오해를 먼저 짚고 넘어갑니다.
세상을 고전 서양철학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이분법적으로만 보지 말고 사람들이 세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이원성을 적절히 생각하며 조화롭게 그리고 변증법적으로 바라보자, 즉 "이분법을 타파하고 이원성을 엮어내자."는 말이며,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비판할 의도나 까닭이 없고, 양비론이나 극단적 상대주의를 지양하며, 해체주의나 포스트 모더니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첫 번째 이원성: 공동체성과 개체성

▲ 2022 PBL센터 6월 교육과정 스터디 활동 공유
왜 선생님께서는 나무학교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셨습니까? 왜 선생님께서는 저의 졸고를 읽고 계십니까?의 질문에 단언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끔은 여러 이유 중에 하나를 들며 단언하기도 하지만, 그 생각과 말은 금방 바뀌기도 하고 자신의 말과는 전혀 다른 행동과 삶의 양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개인은 본디 공동체성을 띄기도 하고 개체성을 띄기도 합니다. 개인은 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하고, 공동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공동체의 리더가 되어 PBL센터의 첫 교육과정을 열 때, 한 사람이 공동체와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먼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공동체가 와해되는 경우는 먼저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한 개인이 공동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헌신적인 입장만을 취하거나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여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때라고 생각했고,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공동체가 개인에게 가치나 효능감을 주지 못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성장이 공동체의 성장이 되고 공동체의 성장이 다시 개인의 성장이 될 수 있다면 그 공동체의 생명력은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 공동체의 교육과정은 PBL교실과 같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박준일 선생님과 PBL센터 교육과정을 PBL 교실 그 자체로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원성: 자기 생산과 타자 생산

지금 생각해봐도 공동체 첫 해에 굉장히 무모한 도전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가장 무모했던 도전은 PBL센터가 운영되는 해에 바로 공유회를 열어 다함께 수업을 공유한 일 같습니다. 공동체 정규 교육과정을 PBL 교실로 구성했기 때문에, 결과물인 수업을 공유하는 것이 한편 당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큰 모험이기도 했습니다. 수업을 공개한다는 것 자체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우리 선생님들은 자신이 잘 해오던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수업과 고민을 열어야 했고 기꺼이 자신의 수업을 공개해 주셨습니다.
저는 센터장으로서 굉장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남 구름학교교 선생님들께서 미국의 BIE(지금은 pblworks) 워크숍에 직접 참여하며 치열하게 토론하고 공부한 결과로 구름학교 PBL 101 과정을 열어주시고 나무학교에 초대해 주셔서 그 과정을 열심히 수강한 후 충남으로 돌아와 나무학교 PBL센터 멤버를 모집하기 위해 연수 과정을 충남에서 열었을 때 스스로를 '흉내내는 사람', 자기 생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PBL센터 제1회 공유회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우리 공동체가 자기 생산으로 이르기에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과 공동체, 저 스스로가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원성: 객관주의와 구성주의

PBL센터 센터장이 되기 전이 저에게는 가장 힘든 순간들이었습니다. 구성주의 수업을 교조적으로 따랐던 지난 시기의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자 '빈 서판'이라든지 '구성주의와 자율성' 등의 어려운 책들을 읽어야 했거든요. 특히 '구성주의와 자율성'을 읽을 때에는 특히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너무 몰입해서 하루종일 그 생각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가 잘 나가질 않았습니다. 한 페이지에 인용된 철학자와 철학 개념이 10개가 넘었거든요. 하지만, 이 때 얻은 답을 통해 우리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PBL이 단순히 유행하는 수업 모형이 아니라 교사의 철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세상의 지식이 객관적이냐 상대적이냐는 이분법이나 각종 ICT 기기나 LMS 시스템과 같은 각종 유행과 기술에만 빠지지 말고 우리가 가르쳐야 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 2022 PBL센터 2월 교육과정 스터디 그룹 조직

네 번째 이원성: 개방성과 폐쇄성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때 쯤, 개방성과 폐쇄성에 대한 고민을 가장 오래 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는 개방성만 가지게 되거나 폐쇄성만 고집하게 되면 건강함을 금방 잃게 됩니다. 많은 역사적 사건이 그랬으니 한 쪽에 치우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공동체 구성원과 공동체, 이를 둘러싼 상황을 고려하여 언제 얼마만큼 문을 열고 닫을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고 공동체 운영진 사이에서도 생각이 달라 참 쉽지않았습니다.
우리 센터가 폐쇄성의 비율이 높았던 결정은 PBL센터 가입 자격을 나무학교 성장교실 졸업(예정)자이면서 꿈틀 과정을 이수한 사람으로 정한 것, PBL센터의 수업기록을 센터 차원에서 공유하지 않은 일이 있고 센터가 개방성의 비율을 높일 때는 공유회, 성장교실 퍼실 참여, 나무학교 수업축제에 대한 지원, 충남교육연수원과의 협업을 통한 PBL 꿈틀과정과 비행과정 개설, 외부 PBL 단체와의 교류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방성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이제 자신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고 수업과 공동체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폐쇄성의 측면에서는 아직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PBL센터를 통해 센터원들이 인생의 동료로서 수업을 나누는 과정에서 삶과 마음을 나눌 수 있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어떤 못난 모습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안전한 공간은 어느정도 닫힌 공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개방성이라는 것은 폐쇄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늘 고려해야 하고 폐쇄성을 통해 안전해지고 단단해지는 만큼 개방성을 더 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년 단위로 새로운 선생님들께서 PBL센터와 함께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형성한 문화가 건강한 방법으로 더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나가며

PBL의 수업으로나 공동체로나 자신감이 붙었을 무렵 저는 '진짜'와 '가짜' 논쟁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 수업과 동료의 수업이 '가짜'가 아닌 '진짜'인 어떤 경지가 되도록 부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짜'와 '가짜' 논쟁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또 PBL이 정답이냐 아니냐의 논쟁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수업이나 선생됨(혹은 어른됨)은 여전히 복잡하고 잘 해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만 동료들과 함께 하는 이 길이 두렵지도 혼란스럽지도 않습니다. PBL과 PBL센터를 통해 저는 아이들에게 삶을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고, 작은 성공에도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졸고를 통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을 어지럽힌 것은 아닐지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보편성과 특수성 또한 이원성으로 바라본다면 제 짧은 생각이 이야깃거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 2022 PBL센터 2월 교육과정 단체 사진
삶을 가르치고 싶은 교사입니다. Instagram#octu p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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