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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양육, 다시 하나

교육과 양육, 다시 하나

온양여자중학교 교사 이우경
학생들과 교사의 연결, 교사와 교사들의 협력적인 연결, 교사와 학부모의 신뢰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교육은 양육으로부터 시작했고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해봐도 너무나 당연한 진실을 우리는 왜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걸까요? 그리고 이 당연한 연결을 인지하지 못함으로 해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요? 산업화시대의 근대교육, 특히 우리나라의 근대 공교육과 학교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교육은 늘 다른 어떤 것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인류가 생존하고 공동체를 계승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부터 교육은 따로 분리된 채 아주 이질적인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한 대부분의 문제들을 우리는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저 현상으로 바라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육은 어떻게 양육으로부터 분리되었나?

전통적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가까운 친척들과 부족 원로들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은 18세기 산업혁명을 지나며 붕괴되었습니다.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에 맞춰 대량의 훈련된 노동력을 길러내기 위해 근대 학교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가 황국신민화와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하급 관리 양성을 위해 학교를 세운 게 근대 공교육의 시작이었습니다.
해방 후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우리는 뒤늦게 산업화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남들이 300년 동안에 한 일을 30년 만에 해내는 동안 강력한 개발독재와 국가주의 교육체제가 등장했습니다. 분단상황에서 정신적 통제와 국민의 단합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교육은 국가를 위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일이어야 했습니다. 교육내용이나 방식은 극도로 통제되었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교육하는 주체이고, 교사는 그 대리인으로서 정해진 내용을 정해진 방식으로 정해진 시간에 가르쳐야 했습니다. 국가주의 교육체제를 넘어서 인간과 교육을 본질적으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교사에게 허용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진정으로 배우고 있는가를 성찰하고, 아이들의 삶에 실제로 필요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교사들이 고민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 최근 십여 년 사이의 일입니다. 빠른 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지형의 변화로 산업사회와 대량생산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도 한참 더 지났건만 학교 현장의 시스템이나 제도는 마치 죽어버린 거대 공룡의 뼈대를 여전히 못 치운 것처럼 한계와 제약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교사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가르치는 전문가’로 세우기 위해 다양한 학습공동체를 만들었고 배움 중심의 수업을 고민하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새로운 교육 방법을 배우고, 젊은 교사들과 함께 연구하며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교사가 인간과 교육의 문제를 이토록 본질적으로 성찰하고 실천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은 이 땅의 교육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선배 교사들이 꿈꾸어보지도 못한 감격스런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가르치기 힘든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불안정한 내면과 낮은 자존감을 지녔고, 산만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자신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충동을 참는 것이 어려운 그런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어쩌다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늘었습니다. ‘가르치는 전문가’로 저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의 ‘가르치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배우는 사람’에 대해, 그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배우게 되는지를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은 양육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인류는 어떻게 해서 교육을 시작하게 된 걸까요? 최초의 교육은 양육이었을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면서 부모는 이 세상에 아기가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함빡 웃어주면서 아기가 배운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이죠. 아기는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부모와 특별한 정서적 연대를 느끼면서 무엇이든 이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인간의 아기뿐 아니라 동물의 새끼들도 어미를 통해 배우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은 새끼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위대한 설계인 셈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인류는 양육에서 교육으로 나아가게 된 걸까요? 그건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10만 년간 인류는 부족이라는 소규모의 무리를 이루어 생존해 왔습니다. 부족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역할을 해내야만 굶지 않고 생존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역할과 책임을 가르치는 일도 역시 부모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사냥을 나가거나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느라 바쁠 때는 부족의 누군가가 그런 일을 대신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조부모이거나 믿을만한 친족이거나 부족의 원로였을 것입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부족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성년식을 치르고, 사냥과 채집에 관한 각종 전문적 기술을 전수받았을 테고요. 부족의 생존과 계승을 위해 책임을 다하며 기꺼이 모험과 도전을 할 수 있는 용맹한 전사가 되기 위해 정신적인 단련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양육이고 교육인지 분명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교육과 양육이 분명히 같은 뿌리를 가진 일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인류는 과거 10만여 년 이상 양육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교육을 연결하고 세대의 전승과 교체를 통해 꾸준한 문명적 진화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근대 산업혁명 이후 200여 년 사이에 교육은 양육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그 분리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교육자와 양육자 간의 연대와 협력, 양육의 문제가 교육에 미치는 영향, 안정된 내면과 자기 확신을 가지고 타인을 존중하고 협력할 줄 알며 잘 배우는 아이로 키우는 데 필요한 양육과 교육의 역할 등에 대한 연구나 이론, 실제의 교육제도와 시스템이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양육과 교육을 연결해서 바라보기

교육이 양육으로부터 출발했으며,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한 진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전통 사회에서는 양육자와 교육자가 완전히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였으며, 서로 간에 긴밀한 협조와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탄생과 성장, 아이를 교육하는 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였습니다. 아이들은 많은 신뢰할만한 어른들과 애착을 형성하고 그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고 배웠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자존감과 소속감으로 아이는 자신의 공동체에 기여하고 헌신하는 성인으로 자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뇌과학자들은 현재 인류의 뇌가 부족사회의 사회적인 뇌로 진화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교육자와 양육자가 서로를 모르는 상태이며,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문제가 공동체의 관심사에서 점차 사적인 영역의 일이 되어버리고, 아이들이 신뢰할만한 많은 어른들로 둘러싸여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는 현대 사회에서 양육과 분리되어버린 교육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아이들의 뇌가 배우는 환경과 방식에 최대한 가까운 조건의 교육을 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아이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와 그 부모가 믿는 어른으로부터 배우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어릴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이의 안전과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위대한 설계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부모와 연대하지 않고, 교사와 부모가 서로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부모가 되도록 서로 연락하거나 만날 일이 없는 것이 교육이 순탄하게 이뤄지는 증거가 될 정도로 교사와 부모는 서로 연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서로 경원시하거나 불신하는 관계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육이 양육과 완전히 같은 뿌리를 가진 일이라면, 교사 또한 아이들과 애착을 형성하고 교실을 안전기지로 만들어야 아이들이 보다 잘 배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착심리학자와 뇌과학자들은 불안정한 애착으로 불안이 높고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일수록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어렵고 대인관계가 어려워서 높은 학업성취를 이룰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교실 안의 친밀한 정서적 관계, 비난하거나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이 없이 서로 지지해 주는 안전한 학급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교사에게 정말로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실을 안전하고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은 교사 혼자의 힘으로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학생들과 교사의 연결, 교사와 교사들의 협력적인 연결, 교사와 학부모의 신뢰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사들 또한 교육과 양육이 완전히 분리된 시대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아이들과 따뜻하고 안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의 중요성이나 그 방법에 대해 별로 교육받거나 훈련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학교의 시스템이나 제반 관계도 이와는 상관없이 굴러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르치기 힘든 아이들일수록 교육 이전에 양육의 배경 또한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위험에 내몰리는데 어찌 부모가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이는 오랜 시간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부모에게 적응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익힌 것들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이의 정서 행동, 대인관계, 자존감, 학습성취에 대한 태도 등에 부모와의 애착, 부모의 양육태도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부모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성찰하고 아이와의 관계에서 변화를 보이면 아이는 빠르게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대인관계가 나아지며 점차 학업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학교는 점차 양육 서비스 기관이 되어가고, 학부모는 점차 양육 서비스 소비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학부모가 양육의 주체로서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양육 서비스 소비자로서 요구하고 불만을 제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교사는 학부모들을 귀찮고 두려운 민원인으로 여기게 되었고요.
그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제도나 정책이 필요할까요?
학교에는 학부모와 교사가 함께 교육받고 논의하고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기구나 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학부모를 대하는 일이 담임 개인의 일이 되지 않고 학교 차원의 일이 되려면 교장의 가장 중요한 책무가 부모 코칭이 되어야 할 테고요. 양육과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를 위해 그 부모를 돕고 코칭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전문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전문인력 안에 감정 코칭, 부모역할 훈련, 양육 태도의 점검 및 전문적인 부모 코칭과 상담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교사들을 교육하는 일도 또한 필요할 것입니다.
아이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담임과, 아이와의 양육관계를 성찰하고 양육자로서의 균형을 지키려 노력하는 부모와, 이들을 도울 전문가들이 한팀이 되어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하고 토론하며 해결 방안을 함께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제도와 시스템이 학교에 도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담임교사에게 교과 지도와 학사행정에 관한 업무, 학교의 모든 부서의 업무실행에 필요한 각종 협조업무까지 모두 짊어지게 만드는 현재의 담임제도는 대폭 손질해야 할 것입니다. 학급의 인원수는 담임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충분히 관찰하고, 대화하고, 그 부모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적정 수준으로 줄어야 할 것입니다.

교사와 부모는 완전한 한팀

교육과 양육이 서로 완전히 같은 뿌리로 연결된 일이라면, 교사와 부모는 서로에게 최고로 중요한 동지이자 완전한 한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와 학부모는 긴밀히 함께 움직이는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뉴스에서 흉흉하게 듣는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사건들, 지쳐가는 교사들, 학교에 오지만 배우지 않는 아이들, 심각한 학교폭력의 문제까지, 분리된 낱낱의 현상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연결된 실체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데서 문제의 원인도 해결책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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